현타의 나라가 된 대한민국

입력
2021.08.04 20:00
25면

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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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따질 것도 없다. 역시 제일은 건물주다. 이제는 이런 말을 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거리낌 없이 나눈다. 물욕을 인정하는 것이 천박하게 여겨지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고상한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자애로운 사람도 헌신적인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도,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알고 보니 다들 부동산에도 대단했다. 물론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도 하시겠지만, 오히려 맞장구쳐줄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현타가 아주 잦다.

본래 불순한 말에서 비롯되었기에 금기어이기도 했다지만, ‘현타’는 이제 당당히 국어사전에도 나온다. ‘현실 자각 타임’의 준말이다.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고 한다. 현타를 겪는 사람들의 상태를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는 것이라 하니 씁쓸하다. 이상과 비전, 가치라고 믿어 왔는데 망상이란다. 이래서 어른들의 말이 맞는가 보다. ‘그거 해서 밥 먹여 주냐’, ‘얼굴 보고 살 거냐’ 등등. ‘알뜰살뜰’이나 ‘근면성실’은 옛날 전과에나 촌스러운 글씨체로 적혀 있던 빛바랜 문구로만 떠올려진다.

그래도 성경은 위로를 해줄까? 물론 성경의 가치관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전통적 윤리를 가르친다. 하지만 여기에도 현타가 있다. 전도서의 저자가 이렇게 입을 연 적이 있다 (9:13-16). “나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겪는 일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모범적이고 존경받을 지혜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충격이었을까?

“주민이 많지 아니한 작은 성읍이 있었는데, 한 번은 힘센 왕이 그 성읍을 공격하였다. 그는 성읍을 에워싸고, 성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였다. 그때에 그 성 안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막강한 공격을 지혜로 막고 자기 성읍을 구하였는데 그 사람은 금방 잊혔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에 그 사람을 현인이나 영웅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겪은 현타를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늘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그의 지혜가 성읍을 구했지만, 위기가 지나고 일상이 돌아오자 그는 그저 볼품없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멸시까지 받았다. 만약에 그가 탁월한 식견만 있던 자가 아니라 좋은 명함에 우러러볼 만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가진 자였다면 달랐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성읍을 구한 그 지혜로운 사람은 잊히고 멸시를 당했지만 그저 성읍을 구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했을까?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이런 글이 전도서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앙이 고매하고 가치관이 꼿꼿한 사람이라 하여도 성자가 아닌 이상 어느 누구도 물질적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같은 지혜문헌인 잠언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도 전통적으로는 매우 교조적으로 이상적이다. 하지만 전도서 저자의 꼿꼿한 자긍심도 결국 가난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현타가 지혜자의 지혜에 좋은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노동은 언제나 정당한 보상이 보장되어야 한다. 감히 그것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려는 것은 아주 잔인한 것이다. 부로 부를 축척하기 위한 장치는 정당하게 유지되고 국민들에게 헛된 망상만 제공하는 나라, 근로와 노력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가 난센스가 되어버린 나라. 결국 국민들은 현타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기민석 목사ㆍ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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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목사ㆍ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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