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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이 끝나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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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A씨는 2012년 4월부터 팀장 최모씨에게 1년간 성희롱을 당했다. 최씨는 "전신 마사지를 해주겠다"거나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치근대며 원치 않는 신체적 접촉을 하고 개인적 만남도 강요했다. 참다 못한 A씨는 회사에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회사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두 사람을 불러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자"며 퇴사를 권고한 것이다. A씨는 이를 거부했고, 회사는 최씨에게 정직 2주의 징계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2차 피해도 발생했다. '여자가 먼저 꼬셨다' '피해자도 보통이 아니다'라는 음해성 소문이 돈 것이다. 소문의 진원지는 사건을 조사한 인사팀이었다.
A씨는 2013년 6월 최씨와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자 회사는 보복성 조치를 가했다. 한겨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대기 발령을 냈고, A씨의 소송을 도운 직장동료는 기밀 유출 혐의로 고소까지 당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14개 단체들은 "성희롱 사건 후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이 총망라된 경우"라며 2014년 2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대응에 나섰다.
A씨는 2014년 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다.그는 지난달 21일, 8년 넘게 이어진 법정 싸움을 끝냈다. 결과는 '완승'이었다. 2019년 끝난 민사소송에서 법원은 사측의 징계가 2차 피해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A씨에게 3,000만 원을 추가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이 재판에서 대법원은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회사의 '불리한 조치'의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하기도 했다. 지난달 마무리된 형사소송에서도 법원은 피해자에게 부당한 조치를 했음을 인정해 회사에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간단한 결론이 나오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A씨는 정부와 검찰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는 회사가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했다며 2014년 2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같은 해 6월 검찰에 고소를 했다. 그러나 두 기관은 모두 “회사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입증이 어렵다" "판례가 없다"며 5년 가까이 사건을 방치했다.
A씨는 수도 없이 회사를 관두고 소송을 접고 싶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버틴 이유는 "성희롱을 신고해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자신의 사건이 공론화되자 '나도 당했다(미투)'며 연락을 해온 수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소송이 끝난 후 그가 전한 소감문에는 기쁨보단 막막함이, 기대보단 걱정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소감문에서 "소송이 끝나니 알 것 같다. 이런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입법·행정·사법부가 모두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에 대한 걱정도 털어놨다. 그는 "방패막이가 됐던 소송이 종료된 것이 두렵다. 회사가 또 어떻게 괴롭히기 시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길고 긴 재판을 거쳐 진실이 가려지고, 처벌이 이뤄졌다. 그러나 가해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회사는 아직도 사과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고 있다. 8년을 묵묵히 싸워온 A씨는 그래서 두렵다. 그의 용기에 우리 사회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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