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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역사 쓰고 새 100년 준비하는 '소라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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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1년 내내 풍요가 넘치는 곳이다. 벼를 수확하는 가을은 물론 봄, 여름, 겨울에도 가을을 느끼게 한다. 노란 벼가 현미를 거쳐 하얀 쌀로 탈바꿈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불러온다.
정미소는 과거 가난한 시골에선 부의 상징이었다. 시골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공장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촌에선 정미소와 양조장(술도가), 과수원집 주인을 3대 부자로 꼽았다. 술도가는 주류제조 면허가 있어야 했기에 돈만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었다. 사과와 배 등 과수원은 재배기술이 까다롭다. 아무리 농사를 오래 했더라도 웬만큼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미소는 전국적으로 한때 2만 개나 됐다고 한다. 경북 청도에도 과거 146개나 정미소가 있었다. 정미소가 많았던 것은 과거 도로망이 열악하고, 운송수단도 기껏해야 손수레나 소달구지가 전부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농번기는 물론 농한기라고 해도, 정미소에 방아를 찧으러 가서 하루 해를 다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 여물 먹이는 일까지 고려하면, 한나절에 마칠 수 있는 거리에 정미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시골마을에서 흔하디 흔한 정미소는 이제 청도에선 소라정미소를 포함해 4곳이 전부다. 다른 곡물이나 채소 가격과 비교해 쌀값 하락폭이 커지면서 도정 수입이 급감했고, 농협이 주로 운영하는 대형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시ㆍ군마다 한두 개씩 생긴 게 정미소가 줄어든 가장 큰 이유다. 특히 도정부터 포장까지 거의 완전 자동화시스템을 갖춘 RPC 사이에서 동네 정미소가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현금 대신 도정한 곡식의 일부를 공임(삯)으로 받는 물납 형태로 거래가 된다. 쌀값이 하락하면 수입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24일 오후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 소라정미소. 구한말인 1900년대 초부터 지금의 김기진(73) 대표 조부가 정미소를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김 대표 부친이 물려받았고, 이어 김 대표의 삼촌, 사촌 형을 거쳐 1960년대 말 다시 김 대표가 주인이 됐다.
소라정미소는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IC에서 5㎞가량 떨어진, 전형적인 시골마을에 있다. 군소재지를 벗어나자마자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복숭아밭이 반긴다. 수확이 막바지에 이른 백도와 한창 씨알이 굵어지는 황도, 한창 수확 중인 좀 딱딱한 복숭아의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청도천을 가로지르는 소라교를 건너면 소라리 마을이다. 정미소는 마을 한가운데인 마을회관(소라리복지회관) 바로 앞에 있다.
들판을 관통하는 청도천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 청도천 덕분에 주변 농지는 비옥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마을 한복판에 있는 정미소이다 보니, 방아를 찧으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김 대표는 "쌀 수입 개방 전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오전엔 우리 정미소 앞 도로가 벼 부대를 싣고 온 트럭이나 트랙터로 가득 찬다"고 말했다.
소라정미소는 겉보기에는 여느 시골마을 정미소와 비슷하다. 함석판을 덧대 만든 출입문과 벽체, 경량패널로 된 지붕, 무엇보다 먼지가 잔뜩 쌓인 도정설비와 주변이 그렇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정기계 주변에 새카맣게 붙어 있던 참새들이 일시에 후르르 날아올랐다. 사람이 잠시 비운 사이 참새가 이 방앗간 주인 행세를 한 셈이다.
김 대표는 "마침 오늘 도정해야 할 게 남았다"며 지게차로 엄청난 크기의 벼 부대를 옆 창고에서 싣고 왔다. 1톤가량의 벼가 들어가는 '톤백'이다. 투입구 앞에 세운 뒤 부대 위 고리에 크레인을 걸고 들어올렸다. 이어 아래쪽 묶음을 풀자 노란 벼가 투입구로 사르르 쏟아져 내렸다. 도정 준비를 다 마친 셈이다.
스위치를 올리자 굉음과 함께 벼가 스르르 투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1단계에서 벼는 왕겨와 현미로 분리된다. 왕겨는 별도의 배출구로 날아갔다. 예전엔 왕겨를 주로 아궁이 땔감이나 거름 만드는 데 썼다. 요즘은 축사 깔개용 등으로 많이 쓰인다.
현미는 필요에 따라 별도 포장해 판매하지만, 대부분 백미로 가공된다. 현미에 붙은 쌀겨 등을 깎아내는 도정기를 3번 돌아 나온 뒤, 돌과 이물질을 걸러내고 최종적으로 20㎏, 40㎏, 80㎏ 단위로 자동 계량돼 포장한다. 투입에서 백미로 가공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다.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빨라졌다.
100년이 넘은 정미소라고 해서 잘하면 냉각수와 연료통이 외부에 있는 1기통 발동기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발동기에 넓적한 벨트를 높은 곳에 있는 풀리에 바로 또는 교차로 걸고, 다시 여러 개의 벨트가 도정기를 돌리는 모습을. 벨트가 겉돌지 않도록 시커먼 콜타르를 수시로 찍어 바르는 모습도 연상했다.
없었다. 서운함이 확 밀려왔다. 김 대표는 "우리 마을은 시골이지만 다른 지역보다 전기가 일찍 들어왔고, 제가 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미 전기모터로 정미소를 돌렸다"고 설명했다. 1900년대에도 물레방아나 소가 아닌 내연기관을 썼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김 대표는 “예전에는 ‘쌕쌕이’라고 하는 엔진을 썼고, 이후에 디젤엔진을 사용하다가 전기모터로 교체했다”며 “요즘은 도정기마다 별도로 모터가 달려 있고, 또 V벨트로 동력을 전달하기 때문에 도정할 때 수시로 벨트를 걸고 벗기는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라정미소엔 다른 정미소에서 찾아보기 힘든 보리 도정기도 남아 있다. 수수 같은 곡물은 보리 도정기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멀리서도 이곳을 찾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 셈이다. 세워둔 보리 도정기 옆에는 꿀벌이 새카맣게 붙어 있었다. 김 대표는 “아까시꿀이나 밤꿀이 많을 때는 없는데, 요즘처럼 꽃이 별로 없을 때면 이렇게 많이 온다”고 말했다. 양봉업자들에 따르면, 꿀벌이 꽃가루 대용으로 곡물가루를 먹는다고 했다. 여왕벌에게 줄 로열젤리를 만들기 위해선 꿀은 물론 꽃가루도 필수라고 했다.
정미소는 시골마을에서 풍요의 상징이었지만, 김 대표에겐 달랐다. 김 대표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모친이 서른셋이었다"며 "형편이 뻔한 것 아닌가. 국민학교(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다"고 회상했다. 중학교도 못 간 김 대표는 2년간 집에만 있다가 사촌형이 하던 정미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이 까만 교복 입고 모자 쓰고 학교에 갈 때, 난 정미소에서 매일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생활전선을 뛰어야 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어온 정미소와 김 대표의 끈이 다시 이어진 계기였다.
소라정미소가 온전히 김 대표의 것이 된 것은 정미소 일을 배우고 8, 9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김 대표는 "큰집에선 내가 한 10년 정도 일을 배우면 물려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며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마침 마을회관 건립을 위해 회관 자리 바로 앞에 있던 정미소를 옮겨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보고 정미소를 가져가라고 했는데 돈이 없었다"며 "날 좋게 본 마을 주민 한 명이 월 2.5%의 저리로 여러 차례에 걸쳐 그때 돈 30만원가량을 빌려주었다. 그 돈을 다 갚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1970년대 사채 이자는 월 4%, 5%가 기본이었다. 3% 이하는 저리 중의 저리였던 시절이다. 그때 빌린 돈으로 50m가량 떨어진 곳에 부지를 매입하고 새 정미소를 지은 게 지금의 소라정미소다. 당시만 해도 정미소는 김 대표에게 고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소라정미소가 대형 RPC 틈바구니에서 명맥을 잇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 대표는 “우리 정미소 쌀을 한번도 먹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밥맛이 최고다"라며 "남쪽지방에서 밥맛 좋기로 유명한 삼광벼나 일미벼만 취급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논 10여 마지기에다 위탁경작 논을 더한 60여 마지기(약 4만㎡)에 삼광벼만 심고, 마을 주민들도 대부분 삼광벼나 일미벼만 한다"며 "수확한 벼를 기계에 넣어 건조하는 것과 달리 햇볕에 자연 건조해 필요할 때 도정한다. 밥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자신했다.
소라정미소는 떡방앗간도 운영한다. 연중 하는 게 아니라 추석, 설날 명절을 앞두고 2주가량 가래떡만 뽑아 전국에 배송한다. 가래떡을 2번 뽑아내는 덕분에 잘 퍼지지 않고 쫄깃한 식감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소라정미소는 이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 중이다. 직선거리로 1.8㎞가량 떨어진 화양삼거리 옆에 새 정미소를 신축 중이다. 곡물 도정설비와 별도로 대형 냉장고를 갖춘 떡방앗간도 들어선다. 김 대표는 "큰아들 준규(49)가 가업을 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준규씨는 청도에서 유명한 자동차 정비 기술자다. 작은아들은 한 지방거점국립대학 교수로, 딸은 치과의사다.
전국의 일반 정미소가 자취를 감추는 와중에 새 정미소를 짓는다는 것이 무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자신한다. "대형 RPC가 가질 수 없는 밥맛 하나로 승부하겠다. 아들이 전국 최고 밥맛을 자랑하는 소라정미소의 새 역사를 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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