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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해도 괜찮아” 올림픽 시대정신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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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은 이제 올림픽에서 사라져야 할 표현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선수들에게 왕관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을 버텨내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체조 사상 세계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미국의 ‘체조 여왕’ 시몬 바일스(24)는 2020 도쿄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과 개인종합 결선을 기권했다. 부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적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다.
이번 대회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점화를 맡은 일본의 세계 정상급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24)는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여자 단식 3회전에서 조기 탈락했다.
무엇보다 바일스의 기권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목에 걸었던 바일스는 이번 도쿄 대회에서 6관왕까지 차지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27일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에서 첫 번째로 뛴 도마 종목에서 기대에 크게 밑도는 13.766점을 받자 나머지 종목을 뛰지 않기로 했다. 미국 대표팀 전력의 핵심인 바일스가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미국은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에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을 획득했다.
미국체조협회는 “바일스가 의학적인 이유로 기권했다”고 설명했지만 기권 사유는 정신적인 문제로 밝혀졌다. 바일스는 이날 경기 후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 자신의 마음과 몸을 보호해야 한다”며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있게 되면 정신이 좀 나가게 된다”고 말했다.
바일스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 건 대회 직전부터였다. 바일스는 26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때로는 내 어깨에 온 세상의 짐을 짊어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체조 선수로는 많은 24세의 나이에 ‘올림픽 챔피언’을 지켜야 한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국 CNN은 “20세가 되면 많은 체조 선수들이 은퇴하거나 힘겨운 시기를 보낸다”며 “여자 선수들 중에는 1968년 대회 이후 개인종합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킨 선수가 전무하다”고 전했다.
한 국가의 금메달이 유력한 종목에서 선수가 경기 중 부상이 아닌 다른 사유로 기권하는 일은 흔치 않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에겐 국위선양이 우선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올림픽 시대정신이 바뀌었다. 국위선양보다 선수 보호가 먼저라는 인식이 생겼다. 경기 도중 갑작스러운 기권에도 바일스에게 돌아온 건 비난이 아닌 '폭풍 격려'였다.
바일스가 평소 ‘롤모델’로 꼽아온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SNS에 “우리는 바일스가 자랑스럽고 응원하고 있다”고 적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땄던 전 미국 체조선수 앨리 레이즈먼은 “얼마나 심한 압박이 있었을지 생각해 달라”며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도 사람이다. 그들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압박 속에도 일상 생활의 루틴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 미국 언론들도 바일스를 사상 최고의 선수를 뜻하는 ‘G.O.A.T(Greatest Of All Time)’ 표현을 쓰며 치켜세웠다.
바일스의 기권 결정은 과거 오사카 사례가 참고됐다. 오사카는 5월 프랑스 오픈 도중 인터뷰 거부로 논란의 중심에 서자 잔여 경기 출전을 포기했다. 당시 오사카는 “난 태생적으로 잘 떠들지 못하고 전 세계 언론 앞에서 얘기하기 전에 엄청난 두려움의 파도를 만난다”고 고백했다. 정신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은 오사카의 결정에 동료 선수들은 지지를 보냈다. 일본 네티즌들도 “인터뷰보다 선수 존중이 먼저 보장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도쿄올림픽에서 오사카는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에도 질문 1개만 받는 조건으로 응했다. 하지만 성적에 대한 부담은 떨쳐내지 못하고 3회전에서 일찌감치 짐을 쌌다.
바일스와 오사카의 사례를 두고 미국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이제 정신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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