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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컷' 안산이 쏘아올린 공… '성평등 올림픽'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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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올림픽은 48.8%의 여성이 참여하는 대회 사상 첫 번째 ‘성평등 올림픽’이 될 것입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2020 도쿄올림픽에 앞서 이렇게 공언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에는 여성 참가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과거에 비춰보자면 역대 최고를 기록한 여성 참가 비율에 더해 개막식 선서자의 성비를 맞추고 남녀 선수가 공동 기수로 나서는 첫 올림픽인 도쿄올림픽은 성평등을 위한 고민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올림픽이 한창인 이날 국내에서는 시대착오적 페미니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24일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혼성전으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안산(20·광주여대) 선수를 두고 일부에서 그의 짧은 머리 모양, 즉 '숏컷(쇼트 커트)'을 트집 잡기 시작한 것.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한 사격 국가대표 박희문(20·우리은행)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숏컷하면 다 페미(페미니스트)"라면서 이들을 응원하지 않겠다는 날 선 반응이었다.
짧은 머리를 남성의 전유물로 보고 페미니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인식에서 출발한 이번 논쟁은 여성 운동선수들의 외모를 향하던 기존의 잣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여성 선수의 경우 부진한 성적을 내기라도 하면 "외모에 신경 쓸 시간에 운동이나 해라"라고 일침을 가하면서 꾸미는 일을 '죄악시'하던 분위기가 팽배했다. 2006년 국가대표팀 소집훈련 도중 성형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았던 펜싱선수 남현희가 대표적인 사례다.
꾸미면 꾸미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비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상. 한지영 신체심리학자는 이를 두고 "쇼트 커트면 '페미' 낙인을 찍고 너무 꾸미면 운동을 열심히 안 했다고 비판하는 이중잣대의 핵심은 여성 개인의 신체를 남성 집단의 통제에 두고 권력을 과시하려는 욕구"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때아닌 입씨름과는 달리 25일 도쿄올림픽 여자 체조 예선에서는 독일 여자 대표팀의 새로운 유니폼이 시선을 끌었다. 하반신 전체를 발목까지 덮는 형태로 이들은 지난 4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유럽 체조 선수권대회에서도 같은 복장으로 경기에 나섰다. 당시 독일체조연맹은 "(새 유니폼은) 스포츠계 성 차별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독일의 여성 기계체조 선수 엘리자베스 자이츠는 이번 올림픽에서 새 유니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리는 모든 여성,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입을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존 유니폼을 더는 입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유니폼을 선택할지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 매일 바뀔 것이며, 경기 당일 무엇을 입을지는 그날 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 운동선수를 향한 복장 규제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이어졌다. 올림픽은 아니지만 같은 달 18일(현지시간) 유럽핸드볼연맹(EHF)의 규정이 정한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유럽비치핸드볼선수권대회에 나섰던 노르웨이 여자 대표팀도 있다. EHF에는 '여성 선수는 비키니 하의를 착용해야 한다'라는 복장 규정이 있는 반면 남성은 무릎 위 10㎝ 길이의 헐렁하지 않은 반바지라면 된다.
노르웨이 여성 선수단은 2006년부터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연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이들은 1,500유로(한화 약 200만원)의 벌금을 감수하면서 반바지와 조끼 형태의 상의를 입고 시합에 나섰다. EHF는 징수한 벌금을 여성과 소녀의 평등을 지지하는 국제 스포츠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국내에서도 비록 시대착오적 사상검증에서 시작됐지만 진정한 '성평등 올림픽'을 향한 변화 역시 시작됐다. 여성 운동선수들을 향한 애먼 비판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에서 여성의 외모가 평가나 규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여성_숏컷_캠페인' 해시태그(#) 운동이 불붙은 것.
한지영 신체심리학자는 25일 안산 선수를 비롯한 여성 선수단, 나아가 짧은 머리길이를 가진 여성 전반을 향한 혐오와 비판에 대항하기 위해 관련 운동을 제안했다. 하루 만에 6,000개 이상의 게시물이 올라왔고, 짧은 머리를 한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머리 길이로 사상검증을 멈춰라" "긴 머리로 태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원하는 머리를 선택할 자유" 등의 사회적 편견을 꼬집는 글이 이어졌다.
한씨 역시 이번 사태로 "올림픽을 통해 한국에서는 이런 지점들이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지점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주체적이고 외관이 아닌 '기능하는 몸'으로서의 여성을 그 어떤 올림픽에서보다 많이 접하게 된 세대를 향한 기대다. 그러면서 "미디어에서 보던 전형적인 여성상이 아닌 마음껏 포효하고 발을 구르고, 큰 힘을 발휘하는 여성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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