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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워커하우스, 대구 캠프 워커, 서울 워커힐...전쟁 영웅 워커 장군의 흔적들 

입력
2021.07.31 04:30
15면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4> 정전협정 68주년...워커 전 미8군사령관을 추모하며



본격적으로 도시 답사를 시작한 것이 7월로 만 4년째가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시와 그 주변의 경기도 일부 지역 즉 '대서울(Greater Seoul)'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한국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답사는 지금 대서울을 넘어 한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대서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전역에서 바로 지금 펼쳐지고 있는 '갈등 도시'의 현장을 찾아가서 기록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국일보 연재 첫 회에서 부산 산동네의 폐허가 된 벽화마을을 찾고, 사회 각계각층의 땅투기가 발각된 경기도 광명과 시흥 사이의 계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핀 이유가 이것이다.

나의 관심은 단순하게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고 맛집을 들르거나, 조선 시대의 유명한 지배층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다. 나의 관심은 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2021년 한국에서 확인되는 '갈등 도시'의 모습들을 찾아가서, 그 갈등이 왜 일어나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나의 답사의 목적이다.

답사의 키워드

21세기 한국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진 6·25 전쟁이다.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1919년 4월 11일, 제국주의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총선거를 거쳐 한반도 남부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북부의 북한이 남부의 대한민국을 침공한 1950년 6월 25일, 그리고 3년에 걸친 전쟁을 중지하는데 합의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한 1953년 7월 27일을 거쳐 확립되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식민지화 이전의 조선왕조나 대한제국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인 만큼, 이 날짜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특히 강조되거나 어느 하나가 버려지면 안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과 미국 등 국가에 독립을 호소했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갓 탄생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이 군대를 보내 북한 중국 소련의 침략군을 무찔렀다. 대한민국은 탄생한 직후부터 국제사회에 관심을 호소하여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독립과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제사회의 힘을 통해 생존했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국제적인 성격은, 조선왕조를 비롯해서 그 이전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던 그 어떤 국가들도 지니지 못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지니는 이러한 독특한 성격이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했다.

잊힌 영웅 월턴 워커 장군


월턴 워커. 위키커먼즈

월턴 워커. 위키커먼즈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북한의 침공에서 중국의 침공 사이의 기간에 대한민국의 생존을 군사적으로 확보해준 월턴 워커(1889~1950) 장군이었다.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미군 장군으로서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맥아더 원수가 유명하지만, 실제로 한반도 곳곳의 최전선을 지프차로 누비며 연합군을 지휘했고 전사한 사람은 워커 장군이었다. 미8군 사령부가 자리한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의 사령부 건물 앞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이 맥아더 장군이 아닌 워커 장군이라는 사실이 이를 상징한다.


평택 미8군 사령부 앞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김시덕 제공

평택 미8군 사령부 앞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김시덕 제공


1889년 12월 3일에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월턴 워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유럽 전선을 지휘한 뒤, 제국 일본의 항복 이후 1948년에는 일본 열도를 점령중이던 미8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침략군에 맞서 한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맥아더 원수로부터 받은 워커 장군은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를 한국에 보냈으나, 이 부대는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다가 패했다. 죽미령 전투가 일어났던 지점에는 현재 유엔군초전기념관이 세워졌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미군 병사와 그 가족으로 보이는 일군의 미국인들이 유엔군 초전비를 참배하고 있었다.


경기도 오산의 유엔군 초전비. 김시덕 제공

경기도 오산의 유엔군 초전비. 김시덕 제공


미군의 선봉대는 침략군의 기세를 꺾었지만 침략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에 워커 장군은 한반도 동남부의 좁은 지역에 저지선을 마련하여 반격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서남쪽의 마산에서 대구 북쪽을 거쳐 동북쪽의 경주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 즉 워커 라인(Walker Line)이 설정되었다.


부경대 워커 하우스. 2021년 7월 김시덕 촬영

부경대 워커 하우스. 2021년 7월 김시덕 촬영


"사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는 워커 장군의 독려를 받으며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생존을 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던 1950년 9월 6일에서 18일 사이, 유엔지상군사령부 및 미8군 사령부가 현재의 부경대학교 내에 설치되었다. 워커 장군이 근무하던 워커 하우스(Walker House)는 휴전 협정 이후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부속 건물로 이용되다가 1990년에 화재를 당한 뒤 2020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한국 전역에 존재하는 워커 장군의 흔적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이 워커 하우스를 얼마 전 부경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된 인연으로 답사한 것이, 이번 회에 워커 장군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다.

대구 캠프 워커. 2018년 3월 이승연 촬영

대구 캠프 워커. 2018년 3월 이승연 촬영

1950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부산의 사령부는 대구로 북상했다. 이를 기념하여 대구의 미공군부대에는 캠프 워커(Camp Walker)라는 이름이 붙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군이 사용하던 이 기지는 광복 후 한국군이 사용하다가 6·25 전쟁 당시부터 미군이 주둔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캠프 워커 자체는 대구에 그대로 주둔하고 있지만, 대구시는 부대의 부지를 순차적으로 반환받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매일신문 2021년 6월 18일 자 '캠프워커 서편도로 반환 되나… 3차 순환도로 완전 개통 기대').

중국의 참전, 워커의 최후

1951년 1월 29일에 열린 워커 장군 추도식 사진. 2019년 10월 김시덕 촬영

1951년 1월 29일에 열린 워커 장군 추도식 사진. 2019년 10월 김시덕 촬영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연합군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이 한반도를 통일하기 직전이던 1950년 10월. 중국이 전쟁에 개입했다. 대한민국은 이로 인해 한반도 통일에 실패했으나, 1992년 8월 24일의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측에 이 개입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오류를 저질렀다. 더욱이 중국은 대한민국 측에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지만, 대한민국은 중국 측에 북한과 단교를 요구하지도 못했다. 1992년 당시 이런 굴종적인 외교 스탠스를 보였기에, 2021년 현재에도 중국 측은 우리나라에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워커 장군 추모비. 2017년 11월 김시덕 촬영

워커 장군 추모비. 2017년 11월 김시덕 촬영

이렇듯 일방적인 중국의 참전은 연합군을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연합군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지프차를 운전하고 북쪽으로 향하던 워커 장군은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 남쪽 5㎞ 지점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국군 운전병이 과실로 추돌사고를 일으킨 것이었다. 정확한 사고 지점은 현재의 서울 도봉구 도봉1동 596-5번지라고 하며, 현재는 수도권전철1호선 도봉역 2번 출구 인근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시신은 미국의 국립묘지인 알링턴에 모셔졌다.

워커힐의 유래

워커힐. 2018년 8월 김시덕 촬영

워커힐. 2018년 8월 김시덕 촬영


워커 장군이 사망한 13년 뒤인 1963년, 서울과 구리의 경계인 아차산에 워커힐(Walker Hill)이라는 호텔이 개장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유엔군사령관과 이야기하던 중, 미군 장병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시설이 한국에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듣고 건립한 시설이다. "한국 내에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이 있다면, 연간 3만 명이 일본에 쓸어넣고 있는 돈을 여기에 쏟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유사시에 비상소집을 하면 즉시 응소해서 신속하게 대비할 수 있으리라"는 목적에서였다고, 현대 서울의 창세기라고 할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손정목 선생은 기록하고 있다(1편 140쪽).


워커힐 내의 워커 장군 추모 시설. 2018년 8월 김시덕 촬영

워커힐 내의 워커 장군 추모 시설. 2018년 8월 김시덕 촬영


이렇게 해서 마련된 위락시설에는 워커 장군의 이름이 붙었고 워커 장군의 추모 시설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곳을 답사하면 이 추모시설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미국에서는 6·25 전쟁을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부르고는 하지만,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에 혼신을 다해 그 생존을 지키다가 전사한 워커 장군은 이곳 한국 시민들에게서도 잊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한국 시민이 그를 잊지는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 7월 마지막 주에 이 글을 쓴다. 부산의 워커 하우스에서 대구의 캠프 워커, 워커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는 평택, 서울의 도봉역과 워커힐로 이어지는 루트를 "워커 장군의 길"이라고 부르고 싶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대체텍스트
김시덕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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