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야채와 계란… '한국인 사망' 호찌민 아파트가 택한 상생의 길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국일보>
지난 6일 베트남 호찌민시 빈탄군의 A아파트 단지 B동 앞.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방역요원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로비 입구가 차단되고 요원들은 라운지 등 주요 접촉 지역에 대한 3주치 폐쇄회로(CC)TV 영상부터 확보했다. B동에 살던 한국인 C씨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베트남 특유의 기습 아파트 봉쇄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경험 많은 방역 요원들은 순식간에 C씨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던 30여 명의 입주민을 선별했다. 이들은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으나 모두 가족들과 함께 격리 조치됐다. 예고 없는 동 전체 봉쇄에 나머지 입주민들도 적잖이 당황했다. 당장 내일부터 출퇴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비축해 둔 생필품마저 넉넉하지 않아서다. 봉쇄 당일은 호찌민 일반 시민들의 외출이 전면 금지된 '16호 지시령' 발동 사흘 전이었다.
그 이후 가장 구하기 힘든 건 야채와 계란이었다. 야채의 경우, 유통 기한이 짧아 시중에 풀리는 물량 자체가 많지 않았다. 계란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호찌민에 계란을 공급하던 현지 양계장 4곳 중 3곳에서 확진자가 나온 탓에 대다수 달걀이 수거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입주민 전용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에 "드디어 마트에 계란이 들어왔다"는 글이라도 올라오면, 주민들은 선착순 달리기를 하듯 뛰쳐나가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됐다.
B동에 거주 중인 40여 한국인 가구들은 숨죽인 채 살았다. 가뜩이나 호찌민이 연일 최다 확진 수치를 경신하는 시기에, 아파트 봉쇄 원인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타국에서 이들을 무척이나 주눅들게 했다. 베트남에 출장을 왔다 코로나19 사태로 2년째 출국하지 못하고 있는 D씨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 안에서 베트남인을 만날 때마다 마스크가 국적을 가려주길 바라면서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다.
봉쇄 5일차에 접어든 11일. D씨는 여느 때처럼 로비에서 배달품을 수령해 조용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 한 베트남인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올 것이 왔구나.' 움츠러든 D씨는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는 그 귀하다는 현지 채소가 가득 담긴 녹색 봉지와 선한 웃음만이 있었다. 놀란 마음에 "나는 한국인입니다(Toi la ng??i han qu?c)"라는 말부터 튀어나온 건 당연지사. 그럼에도 베트남인은 "호찌민에 코로나19가 퍼져 한국인이 감염된 것일 뿐"이라며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받아서 맛있게 드시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이후 B동 한국인 가족들의 식탁은 풀밭이 됐다. 채소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젠 친숙해진 베트남인들이 매일 푸른 봉지에 과일까지 담아 마음을 보내온 것이다. 위기 속 온정은 현지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한 입주민이 고가에 팔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을 무료로 동 주민 모두에게 나눠주면서 가능했다고 한다. 봉쇄 이전, 그저 오가다 보는 사이였던 양국 시민들은 그렇게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진화했다.
D씨와 한국인들은 고맙고도 미안했다. 그러던 중 현지 한국 유통기업인 K마켓이 별도의 계란 공급망을 뚫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B동 한국인들은 돈을 모아 즉시 계란 10개들이 600판을 예약했다. 넉넉한 계란의 실물을 영접한 지난 15일, 한국인들은 "베트남과 한국, 코로나19를 함께 꼭 이겨내자"라는 문구와 함께 계란을 부족함 없이 나눴다. 꼭 하고 싶었던 말, "힘내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진심 역시 수줍게 붙였음은 물론이다.
금보다 귀한 계란을 받은 베트남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입주민 SNS 대화방에는 수많은 인증샷이 올라왔다. "감사해요. 한국"이라는 글들도 넘쳐났다. D씨는 "옛날 우리 시골처럼,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옆집도 가족의 확장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봉쇄를 통해 알게 됐다. 지금은 봉쇄 탓에 집에 가지 못하는 청소부와 로비 직원들의 밥도 번갈아 챙겨 주는 사이가 됐다"면서 웃었다.
채소와 계란이 연결해 준 양국 주민들 간 상생은 C씨의 비보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른바 '계란 보은'의 이튿날 목숨을 잃은 C씨는 베트남 병원의 부주의로 유족한테는 통보도 없이 하루 만에 화장됐다. 논란은 갈수록 커졌고, 이번엔 베트남인들이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먼저 사과했다. "우리가 처분을 잘못했다." "미안하다. 역부족인 방역 상황에서, 부족한 베트남 의료체계가 잘못을 범했다." 그 어디에도 일부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한국인을 우습게 아는 뻔뻔한 베트남인'의 모습은 없었다. 봉쇄가 해제된 현재, B동에 사는 양국 주민들은 여전히 나누고 배려하며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B동 이야기는 오히려 역병의 재난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훈훈한 소식에 호찌민 한인회는 이달 중순 한국 교민 밀집 거주 지역인 7군의 현지 보건소를 먼저 찾아 방호복 200벌과 마스크 2,100장, 라면과 물 등을 기부했다. 지난 26일엔 봉쇄 조치된 호찌민 2군의 E아파트 단지 베트남인들이 보답에 나섰다. 이들은 자국 적십자사가 보낸 채소와 생필품을 기꺼이 한국인 입주자들과 나누면서 "우리는 같은 호찌민 시민"이라며 두 손을 맞잡았다.
C씨 화장 사건 이후, 호찌민 보건당국도 한국인을 더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다. 호찌민시 측은 최근 한국인 경증 확진자 7명을 위해 비교적 시설이 깨끗한 아파트를 별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현지인들 대부분은 확진자 대폭발로 의료시설이 부족해 대학교 기숙사와 실내경기장 등에서 열악한 격리생활을 하고 있다. 앞서 확진 판정을 받고 현지인들과 함께 격리생활을 했던 한 교민은 "시설 관계자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식사 메뉴를 따로 만들어 주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 줬다"고 말했다.
최악의 생산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 중인 호찌민 내 한국 기업들에도 희망의 빛이 보인다. 베트남 보건당국이 최근 확보한 모더나 등 백신 물량을 순차적으로 한국 기업에 풀기 시작한 것이다. 호찌민의 한 대기업 법인장은 "한국 기업인들을 외국인 전문가로 분류하면서, 드디어 백신 접종이 진행되고 있다"며 "기업에 따라 시간 차는 있겠지만 적어도 '베트남에서 백신도 못 맞고 죽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은 사라졌다"고 밝혔다.
베트남의 코로나19 확산세는 쉽게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국가 의료 체계가 열악한 데다, 확산 억제를 위한 '골든타임'을 이미 놓친 탓이다. 충분히 위기가 예견된 상황에서 덱사메타손(dexamethasone) 등 코로나19 대응 기초 의약품도 확보하지 않은 방역 당국의 안이함도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선, 바닥을 보인 방역 역량에 기대기보단 어떻게든 양 국민이 뭉쳐 살아남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다.
"배고플 때 빵 한 조각이 배부를 때 고깃덩어리보다 소중하다(M?t mi?ng khi đoi b?ng m?t goi khi no)." 한국의 계란을 받은 베트남인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남긴 현지 속담은 그래서 아직 유효하다. 28일 현재 호찌민 내 한국 교민 수는 11만 명, 호찌민 전체 인구는 1,100만 명(외국인 제외)이다. 1명의 한국인과 100명의 베트남인.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양 국민의 생존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