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비 전용계좌' 등록 안 되는 전산시스템, 왜 그대로 두나

입력
2021.07.28 11:00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
⑧정부 부처·공기업도 전용계좌 나 몰라라

"민간위탁 노동자에게 노무비 전용계좌로 임금을 지급하는가"라는 한국일보 질문에 대한 정부 부처와 공기업의 답변. 정부가 만든 결제 시스템 중 하나인 'e-나라도움'(국고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에는 하나의 계좌만 등록할 수 있어 노무비만 따로 지급하는 게 원천봉쇄돼 있다. 애초에 가이드라인이 실행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은 기획재정부에서 만든 ‘e-나라도움’ 시스템을 이용해서 민간위탁 업체에 사업비를 줘요. 그런데 이 시스템에는 사업당 지급계좌를 하나만 등록할 수 있어요. 노무비 전용계좌를 따로 등록할 수가 없죠. 현재 시스템에서는 노무비 전용계좌 사용이 불가능해요.” (A 부처 관계자)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대로 하려고 민간위탁 업체에서 노무비 전용계좌를 따로 만들었어요. 조달청에서 만든 ‘하도급지킴이’ 시스템에도 노무비 계좌랑 고정계좌(그 밖의 사업비 지급계좌)를 분리해서 등록했고요. 그런데 업체가 이 시스템에서 사업비를 청구하려고 했더니 고정계좌로만 사업비 총액을 요청하도록 돼 있어요. 노무비 전용계좌는 시스템상 건설 사업 쪽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업체가 사업비 총액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노무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저희도 총액으로 지급하고 있어요.” (B 부처 관계자)

업체의 중간착복을 막기 위해 '민간위탁 노동자의 임금은 별도의 노무비 계좌로 지급하라'는 정부의 ‘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이 시행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중앙정부 부처에서조차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 전산 시스템 등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데다 가이드라인을 지키려는 의지도 높지 않은 탓이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정부 부처 41곳(17부, 6처, 18청)과 공기업 36곳 등 77곳 공공기관에 민간위탁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를 정보공개 청구했다. 이 중 민간위탁 사업을 한 가지라도 하는 기관은 33곳이었고, 33곳 중 노무비 전용계좌를 사용하는 기관은 5곳(산림청·산업통상자원부·한국지역난방공사·인천항만공사·그랜드코리아레저)뿐이었다. 민간위탁을 하는 기관의 15%에 불과하다.

33개 공공기관의 노무비 전용계좌 사용 여부. 그래픽= 송정근 기자


공공기관 85% "예외 조항에 해당" "전산상 불가능"

노무비 전용계좌를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28곳. 적지 않은 기관이 가이드라인 ‘예외 조항’을 이유로 들었다. 노무비 전용계좌 사용 가이드라인에는 ‘인건비를 산정하지 않는 등 사업의 성격상 별도 관리가 불가능한 경우는 적용 제외’라는 조항이 있다. 사업 특성상 인건비를 미리 산출하기 힘든 사업이 있을 수 있으나, 실제로 그 이유 때문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2019년 이 가이드라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예외 조항을 핑계로 전용계좌를 만들지 않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우려했었다.

시스템 문제를 꼽은 곳도 적지 않았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노무비를 따로 계상했지만 결제 시스템에서 노무비 별도 지급이 불가능하다”, “‘e-나라도움’을 만든 기재부의 방침과 가이드라인을 만든 고용부의 방침이 일치하지 않아 가이드라인을 지킬 수 없다”, “전산상의 문제 등으로 전용계좌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답변이 있었다. 기재부의 ‘e-나라도움’과 조달청의 ‘하도급지킴이’ 시스템을 통해 사업비를 지급하는 민간위탁 사업은 모두 노무비 전용계좌 이용이 원천봉쇄돼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고용부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준비하면서 사업비 결제 시스템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부처와 협의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기재부, 행정안전부, 조달청과 시스템상 보완점 등을 협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임금 지급 확인 않는 기관도

노무비 전용계좌를 사용하지 않는 기관도 "매달 민간위탁업체가 제출한 임금 상세내역 등을 확인해 실제 노동자에게 임금이 제대로 지급됐는지 확인한다"는 답변이 많았다. 그러나 노무비가 모두 임금으로 지급되지 않아도 이를 제재할 명확한 규정이나 시스템은 없다.

노무비 전용계좌를 사용하지 않는 데다 가이드라인에서 명시한 임금 지급 확인도 하지 않는 공기업도 3곳 있었다. 공기업인 한국동서발전은 "(가이드라인 실행 전) 기존 계약서상 임금의 확인이나 관리·감독 조항이 포함돼 있지 않아 노동자에게 실제 지급된 임금을 확인하고 있지 않다"며 "향후 신규 계약 체결 시에는 가이드라인 내용을 변경할 예정”이라고 답변했다.

일부 기관 관계자는 “민간위탁과 용역 계약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고 되묻는 등 공공기관의 전반적인 시스템, 관심의 부재가 맞물려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시스템 갖춰진 기관이 노무비 전용계좌도 사용

전용계좌를 사용하는 기관은 노무비 전용계좌 결제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었다. 공기업인 지역난방공사 관계자는 “원래는 건설 공사계약에만 노무비를 노동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상생결제시스템’을 사용했었는데,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이 시행된 후 이 결제 시스템을 민간위탁 사업에도 활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생결제시스템은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이 운영하는 결제 제도 중 하나로, 원청 또는 1차 도급사가 각 노동자의 계좌에 노무비가 직접 입금되도록 노무비 계좌를 별도로 운영한다. 공기업인 그랜드코리아레저 역시 이 상생결제시스템을 통해 노무비를 따로 지급하고 있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의 하도급 상생결제시스템. 노무비를 노동자의 계좌에 직접 입금하도록 설계돼 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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