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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 0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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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영상이 흐른다. 세상이 멈췄다. 훈련장에 나갈 수 없는 선수들은 집에서, 숙소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땀을 흘린다. 코로나도 막지 못한, 꿈의 무대를 향한 집념들이 펼쳐진다. 선수들의 비장한 표정이 스쳐가면서 대회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0. 9. 8… 그리고 마지막 0을 보여줄 때 내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올림픽 개막식장인 도쿄 신국립경기장 지붕의 원을 거대한 0으로 표현했다. 강렬했다. 순간 생각했다. 이곳을 이제 0의 욕망을 상징하는 ‘제로 스타디움’으로 이름해도 좋지 않을까. 익숙한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관습적인 것과 결별하는, 그래서 인류가 다시 꿈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자리로 삼으면 어떨까.
인간이 푸른 초원의 바람을 가르며 누가 빠른지 처음 겨룬 게 언제였을까. 그때 어떤 속된 욕망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승부와 우정만이 있었을 것이다. 도쿄의 이 ‘제로 스타디움’은, 그 순수의 시간을 다시 상상하게 한다. 세계가 단절되고 관계가 무너진 곳에서 새로운 희망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떨어져 있지만 혼자가 아니다’라는 주제의 개막 공연은 그 얘기를 담고 있다.
지루하고 어두운 개막식이었다는 평이 많지만, 나는 0을 극적으로 전시한 이 상징적 장면 하나만으로도 도쿄올림픽은 오래 기억될 것으로 믿는다. 시각을 바꾸니 텅 빈 관중석도 새롭게 보인다. 거대한 침묵의 웅변이 들린다. 정적 속에 예비된 열광과 환호가 들린다. 세상에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는 인류의 이름으로 낯선 싸움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올림픽은 열정의 전시장이다. 그 열정의 본편이 시작됐다. 대회 최연소 참가자인 12세 탁구 선수 자자는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와, 1회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싸워야만 했다. 당신도 꿈을 위해 싸워라”라고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한국의 탁구 신동 신유빈과 접전을 벌이다 패한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은 놀랍게도 환갑을 앞둔 58세였다.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오늘의 나는 내일보다 젊다”며 투지의 아름다움을 전했다.
한국 유도의 간판 안바울은 한판승으로 동메달을 딴 후, 매트에 엎드려 회한과 기쁨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그가 흘린 땀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 여자 양궁은 단체전 9연패라는 위업을 이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3년간 누구의 도전도 허용하지 않은 불멸의 기록이다. 그 불멸의 무게를 잊은 채, 여자 궁사 3명은 별일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코로나 때문에 시행된 메달 셀프 수여식도 좋았다. 경기 연맹 간부들이나 VIP들이 두 손으로 메달을 선수들에게 바치면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목에 걸었다. 젊은 여성들이 들고 나온 메달을 엄숙하게 걸어주던 과거의 권위적 모습을 생각하면, 이 공손함은 새 시대의 징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불행한 시기에 열리는 축복받지 못한 올림픽이다. 하지만 나는 대회가 아무 탈없이 끝나 모두가 일본의 노고에 감사하며 마음을 나누는 해피엔딩을 보고 싶다. 이 어려운 시기 인류는 도쿄에 모였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눈물이 뒤섞인 그곳에, 간절했던 우리 꿈의 흔적이 새겨질 것이다. 도쿄올림픽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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