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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時節) 독서법

입력
2021.07.26 19:00
25면
연암 박지원(왼쪽)과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왼쪽)과 다산 정약용.


“지구온난화로 인한 폭염에 지치고 팬데믹까지 극성이라 겁이 나서 꼼작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요즘 안부를 묻는 모든 이에게 습관처럼 반복하는 필자의 대답이다. 이런 시절에 독서만 한 것이 없겠지만 일상에 지쳐가는 판에 짬을 내서 책 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조만간 열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려면 하루 한 쪽이라도 읽어야 한다.

기왕지사 독서 타령을 했으니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세상에는 읽기는 좋아하지만 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짓기는 좋아하지만 읽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한 말에 공감할 것이다.

“젊은이는 달에 닿을 다리를 지을 재료를 모은다. 아니면 지구 위에 궁전이나 사원을 지을 재료를 모은다. 그러다 마침내 중년이 된 남자는 결국 그것으로 나무 헛간을 짓기로 결정한다.” 창작의 고충을 멋지게 비유했지만, 하늘 밖에 하늘이 있는 법. 이미 조선에 레벨이 다른 분이 계셨으니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연암에게 글짓기는 전쟁이니, 첫 대목은 이렇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모아서 장(章)을 이룸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騷壇赤幟引)"

‘제목이 적국!’, 스스로 잡은 제목을 적으로 여기다니, 범부는 상상도 못 할 경지이다. 연암은 독서하는 법도 일러 준다. ‘사기(史記)’를 예로 보자.

“어린아이가 나비 잡는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요. 무릎은 반쯤 구부리고, 뒤꿈치는 까치발을 하고, 두 손가락은 집게 모양으로 내민 채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잠깐 망설이는 찰나 나비는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아이는 어이없어 웃다가 부끄럽기도 화가 나기도 하지요. 이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입니다.(答京之)”

‘사기’를 읽을 때,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는 말이다. 말이 쉽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시중에 넘치는 해설서를 보면, 원문은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남의 번역을 베껴 입맛대로 푼 것이 태반이다. 읽기는 부족하나 짓기를 좋아하는 경우인데, 해결책이 없지는 않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아들에게 일러준 ‘사기’ 독서법을 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네가 아직도 ‘사기’를 읽고 있다니 아름다운 일이다. 옛날에 고염무가 ‘사기’를 읽을 때 ‘본기’나 ‘열전’은 손도 안 댄 듯 대충 읽었고 ‘연표’나 ‘월표’를 읽으면서는 손때가 까맣게 묻었으니 이것이 제대로 역사책을 읽는 방법이다.(寄游兒)”

극적인 서사만 쫓아가지 말고 사건의 선후와 관련 경위 등을 꼼꼼히 따져가며 분석해 보라는 말이다. 필자는 은사 한조기(韓兆琦) 교수에게 ‘사기’ 읽는 법을 배웠는데, 훗날 생각해 보니 연암과 다산의 독서법을 아우른 것과 맞닿아 있었다. 사마천 팬이라면 국내에도 번역된 ‘사기교양강의(이인호 옮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와 병법을 거론하니 명장 한신(韓信)이 생각난다. 그를 다룬 ‘회음후열전’은 ‘사기’에서 인기가 많은 문장이다. 연암과 다산의 독서법을 상기하며 한신 사료를 다시 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토사구팽’당할 사람은 누구일까. 얽히고설킨 사연과 행적들을 연결해 본다면, 이 또한 2021년식 한국 정치 독서법이 되지 않을까.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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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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