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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다, 고전] 삶도, 시도 중단할 수 없었던 러시아 국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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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국문과 교환학생으로 온 우크라이나 여학생에게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국의 김소월 같은 시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그녀가 받아온 대중적 사랑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아흐마토바는 예술가들로부터도 큰 사랑을 받았다. 그녀를 위해 블록, 만델슈탐, 파스테르나크 같은 위대한 작가들은 헌정시를 썼고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를 그렸다.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그녀의 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된 그녀의 시집들은 절판됐거나 품절 상태다. 다행히 석영중 교수가 번역한 러시아 여성 시인 선집 '레퀴엠'에 그녀의 시 30편이 수록돼 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 것이 / 세 가지 있습니다 / 저녁의 노래와 백색 공작과 / 빛바랜 미국 지도였지요 / 그는 어린애의 울음과 / 딸기잼을 곁들인 차와 / 여자의 히스테리는 싫어했습니다. / …그리고 나는 그의 아내였습니다."('그가 이 세상에서…')
한 남자가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지금 여기'와 무관한 것들이다. 저녁 예배의 찬송, 천사 날개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공작새, 그리고 먼 나라의 지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그는 일상적인 것을 싫어한다. 아이의 울음, 설탕 대신 딸기로 만든 잼을 넣는 달콤한 홍차, 여자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그에게는 히스테리로만 보인다)이 다 별로다. 여기까지야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캐릭터에 대한 서술이지만, 문제는 "나는 그의 아내"였다는 것. 담담하게 쓰인 마지막 한 줄이 종이에 무심코 손가락을 베일 때처럼 통증을 유발한다. 이런 사실의 가벼운 나뭇잎들이야말로 가라앉지 않고 마음의 수면 위를 계속 맴돌며 고통의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흐마토바의 시는 우리를 그녀의 생으로 직진하게 만든다. 집요하게 구애했던 동료 시인 구밀료프와 결혼했지만 이 마음 약한 결정은 그녀의 삶에 재앙이 됐다. 그는 갓난 아들의 울음소리를 성가시게 느꼈고 아내가 내어온 홍차를 싫어했으며 무엇보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의 예민함과 솔직한 자기 주장을 못 견뎠다. "몇 주, 몇 달이 아니고 몇 년 동안 / 우리는 헤어졌네 / (……) 내 옳음의 증거가 여울물처럼 흘러도 / 당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으리라."('결별') 그러나 아흐마토바는 불행 속에 자신을 얌전히 가두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다른 이들과 계속 사랑에 빠졌고 거듭 결혼했고 변함없이 싸웠다.
"고통 만세, 끝없는 고통!"('회색눈의 왕') 시인은 고통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하는 황제와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가슴은 그토록 절망적으로 차가워졌지만 /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네 / 나는 왼손의 장갑을 벗어 / 오른손에 끼었네."('마지막 만남의 노래') 그녀는 늘 가난하고 고통받았지만 장갑 한 짝을 바꿔 끼며 얼어붙은 두 손을 데워 보려는 것처럼 분주히 살았다.
아버지가 '고렌코'라는 원래 성으로 시를 발표하지 못하게 하자, 그녀는 외가쪽 족보를 뒤져 찾아낸 외증조모의 성 '아흐마토바'를 필명으로 썼다. 그런데 그녀의 작가동맹 개인카드에는 "필명-없음"이라고 적혀 있다.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외증조모의 성을 진짜로 여긴 것이다. 두 번째 남편이 시를 쓰지 말라고 협박하며 시들을 불태웠을 때는 푸시킨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의 시들을 다듬었다.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제명돼 시집 출판이 금지됐을 때는 한국 고전시와 동양의 시들을 번역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문학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싸우다 죽어야 전사들의 천국인 발할라에 입성한다고 확신하는 바이킹의 여전사처럼 용감했다.
아흐마토바는 말년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시작(詩作)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렇게 읽힌다. "나는 어떤 슬픔 속에도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아흐마토바의 시집이 다시 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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