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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헛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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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공부가 직업이라니. 그런 환희로운 삶이 또 있겠어?” 벤치에 앉은 K는 다리를 흔들며 선망하곤 했다. 마음껏 배우는 기쁨, 교수가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말하며. “이를테면 나비가 너무 좋아서 평생 나비 연구를 하며 산다고 해봐. 삶이 마음대로만 된다면 자식까지도 누렸으면 하는 게 바로 그런 삶인데.”
반대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찬물을 끼얹곤 했다. “논문 써야지. 강의평가 받아야지. 그것도 힘들어. 갈증도 있지 않을까. 세상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싶다는 갈증. 읽고 쓰는 것 말고 더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마름.” 확고한 K의 답은 엉뚱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좋은 연구도 행동이야. 솔루션 만드는 연구를 더 해도 되지. 정 안 되면 폴리페서라도 하면 됨.”
대학은 안전하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각자 얼마나 전쟁 같은 시간을 통과하든 적어도 캠퍼스에서 저런 세상 한가로운 대화에 몇 날 며칠을 쓴다 한들 별로 다그칠 사람은 없다. 탐구하고, 본질을 보는 근육을 키우고, 주워진 한계를 인식하고 해법을 찾고, 나아가선 우리 모두가 여기 존재하는 까닭과 소명을 깨닫기도 하는 곳. 그런 성찰의 기쁨이 극대화된 공간. 적어도 자영업의 세계라든지, 새벽배송의 전쟁터에 비하면 환희의 터전이란 말도 과장은 아닌 셈이다.
노동자에겐 예외였다. 최근 10여 년간 캠퍼스는 청소노동자 잔혹사의 주무대였다. 대표 악덕 사업장이랄까. 외환위기 이후 변화된 고용구조 탓도 크지만 대학 태도도 한몫했다. 2000년 전후로 외주화와 1, 2년 단위 용역계약이 줄을 이었다. 중간업체는 입찰을 위해 인건비를 줄였다. 같은 건물을 더 적은 사람이 더 빠르게 치우라 강요했다. 해고라는 엄포도 놨다. 많은 대학은 뒷짐 졌고 일부는 대안을 찾았다.
서울대는 그나마 부랴부랴 직고용을 추진한 경우다. 하지만 현실은 비슷했다. 무기계약직 직고용 후에도 “임금과 노동강도가 용역 시절만 못하다”는 비명이 났다. 2019년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지하 휴게실에서 노동자가 숨졌다. 최근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을 홀로 치우던 노동자가 휴게실에 이불을 폈다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황당한 시험 갑질 소식까지 들렸다. 환희는 공유되지 못했다.
내 일터의 솔루션이 이렇게 엉망이었단 게 부끄럽기부터 할 순 없었을까. 보직교수 등이 유족과의 공방에 나서며 쏟아내는 “피해자 코스프레” “서울대 명예” 타령을 보며 생각했다. ‘공부가 직업’인 사람조차도 창피한 줄 모르는 이 멘털리티야말로 한국 교육이 온통 헛공부를 시켜대고 있다는 방증인 건 아닐까.
뉴스에 K도 꽤 분했던 모양이다. 선망하던 연구자 대신 산업역군이 된 터라 부쩍 새치가 는 그다. 격분 끝에 쏘아붙인 맺음말. “야, 교수들이 뭘 아냐? 연구실에 편히 앉아 가지고!” 매도는 말자고 말리려다 이번엔 말을 삼켰다. 얼마쯤은 그의 비난에 편승하고 싶어서.
또 우리 중 ‘편히 앉아 가지고’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내 책상, 건물을 닦는 노동자의 고통 하나를 바꿔놓지 못할 거면 그깟 영어ㆍ한자 표기법은 왜 중요했을까. 키만 큰 건물 더미들에 대학(大學)이라 이름 붙이고 명예는 찾아서 어디다 쓰려던 걸까. 비관하긴 싫지만 으스대봐야 누구의 것이든 다 헛공부일 뿐이다. 어느 한 톨이라도 이 부조리를 한 발짝이라도 개선시키는 데 쓰지 않는 한. 왜 하는 줄도 모르고 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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