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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외과 중환자, 알고보니 특실에... 의료진도 '부담' 

입력
2021.08.03 17:00
수정
2021.08.30 18:01
25면

<23> 오흥권 외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의사들이 환자 면담 시에 입을 유니폼으로 선택한 것은 결국 실험실의 과학자, 화학자, 세균학자가 입는 하얀 가운이었다. 그것은 단지 청결함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배와 통제를 의미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건강의 배신'

평온한 토요일 오후였다. 다른 과에서 응급 수술 중인 환자한테 대장에 문제가 있어 보이니, 외과 팀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환자는 복막염이 심한 상태였다. 원래 과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집도의가 바뀌면서, 원래 수술팀은 모두 철수하고 우리가 수술을 진행하게 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패혈증이 있던 환자는 중환자실로 나왔다. 면회 시간에 환자 남편에게 수술 경과를 설명해주면서, 좀 지켜보다가 상태가 안정적이면 일반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중환자실 그 자리에 가 보니, 있어야 할 환자가 없어 깜짝 놀랐다. 중환자실 베드에 환자가 없다는 건 대개 사망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수소문한 결과, 다행히 환자는 밤사이에 일반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병동의 위치는 12층이라고 했다.

12층. 병원에서 가장 높은 층이자, 의사로서의 지배와 통제가 가장 약해지는 층. 특실층이다. 고위층 사람들은 생활하는 것도 고층이어야 안정감이 드는 것일까? 중세에 성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요즘에는 아파트도 초고층으로 짓고, ‘캐슬’, ‘팰리스’ 같은 웅장한 스케일의 이름들이 사용된다. 12층 ‘팰리스’ 병실에 들어가 보니 어제 평범했던 차림의 남편이 말쑥하게 정장을 입고 있어서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재판관 ○○○’라고 여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전화번호나 회사 주소 같은 세속적 표현은 없었다.

수술 후 별 문제없었던 환자는 어느덧 퇴원할 시점이 되었다.

“선생님도 물론 외과 전문의이시죠?”

당시 나는 외과 전공의 1년차 신분이었다. 판사님 가족에게 위증을 하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네, 전문의 과정입니다”라고 했다. ‘과정’이라는 말은 아주 작고 빠른 목소리로 뭉개면서 내 양심은 지켰다.

“그럼 선생님 방은 몇 층이죠? 제가 꼭 드릴 선물이 있어서요.”

1년차 전공의가 혼자 쓰는 방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공간은 창문이 잘 안 닫혀서 비가 들이치고 가끔은 비둘기가 들어와서 벽면에 오물을 투하하고 가는, 매우 협소한 2평 남짓의 공간에 삐걱거리는 2층 침대가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누추한 당직실뿐이었다.

“5층에 방이 하나 있긴 한데, 제가 수술 때문에 낮에는 방에 갈 시간이 없습니다. 혹시 다른 선생님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날, 2년 차 선배가 당직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퇴원하는 길에 나를 찾더니 ‘과장님’께 꼭 전달해 달라면서 양주 몇 병을 맡겨 놓고 가더라는 말을 들었다. ‘전문의 과정’이라는 말을 ‘전문의 과장’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환자와 보호자로부터도 일체 금품을 받을 수 없게 된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존재하기 전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술 없이도 잘 살았지만, 고결한 판사님이 주는 것을 어떻게 안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명함에는 전화번호도 주소도 없어서 돌려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현재의 나는 현행 법에 대한 준법정신이 매우 투철한 사람이다.)

특실 환자를 보러 가는 것은 의료진에게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내는 고가의 비용은 시설이용에 대한 비용이겠지만, 의료진의 몸가짐도 괜히 그 품격에 맞춰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돈과 권력 앞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는 불편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묘한 공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보안 요원이 상주하고 있다. 일반 병실과 특실은 문을 여는 방법부터 다르다. 1인실을 포함한 모든 일반 병실의 문에는 작은 유리창이 나 있어서 병실이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다. 그렇지만 특실에는 안과 밖이 완전히 차단된 나무 문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노크를 하게 된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회진을 한 번 돌아도 되겠습니까?’ 하는 정중한 요청을 보내는 것이다. 침대도 훨씬 크고 침구도 매우 두텁고 포근해 보인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환자가 해당 과의 병동에 입원해 있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굳이 특실을 가겠다는 환자를 만나면 어떻게든 설득을 해 본다. 일반 1인실도 ‘저렴하지만’ 꽤 쓸 만하고, 특실은 외과 전문 병동이 아니라서 즉각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는 '괴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무엇보다 특실 환자들은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특실의 바닥과 복도에는 대리석과 카페트가 깔려 있다. 수술을 받게 되면, 빠른 회복을 위해서 수술 다음 날부터 아픈 배와 수액걸이를 부여잡고 운동을 하게 되는데, 안락함과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특실에서는 이 부분이 어렵다. 병실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특실 문화가 병실 복도를 돌며 운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외과 병동의 문화와 충돌한다. 복도에 있는 화려한 문양과 요철을 가진 카페트가 수액걸이의 바퀴와도 상극이어서 잘 굴러가지 않는다.

어쨌든 고립된 특실은 외과와 잘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픔은 고립보단, 이웃들과 함께 나눌 때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분당서울대병원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저자

분당서울대병원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저자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인이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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