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 질문에 ‘스님들도 모기를 죽이냐?’는 것이 있다. 살생의 범주에 대한 물음이다.
‘죽이지 말라는 원칙을 중시할 것이냐’와 ‘선택적인 유연성을 발휘할 것이냐’라는 백제와 신라의 불교적인 관점에서도 살펴진다. 불교가 국교이던 삼국시대, 백제 제29대 법왕(재위 599∼600)은 599년 전국에 ‘살생 금지령’을 반포한다. 이로 인해 모든 사냥도구 또한 불태워진다. 이에 반해,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광법사는 600년대 초 화랑에게 ‘살생유택’을 가르친다.
비슷한 시기, 원칙론을 교육받은 백제와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신라. 평화의 시대였다면, 백제의 교육 역시 충분히 훌륭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두 나라의 살생에 대한 이해는 이후 삼국통일이 신라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배경이 된다.
여기에 화랑에게는 ‘임전무퇴’도 있는데, 이는 고대 전사 집단에 전해지던 ‘전쟁 시에 죽으면 천당으로 간다’는 믿음과 관련된다. 흔히 황산벌 전투 하면,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만 떠오른다. 그러나 관창의 죽음 이전에, 장군 흠춘의 아들 반굴 역시 적진으로 돌격해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죽음은 모든 유기체에 내재하는 본질적 공포이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고 죽음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이슬람에서 ‘성전(聖戰)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꾸란 4:74)’는 것과 유사한 관점임에 틀림없다.
인도의 종교 전통에서도 불살생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다. 자이나교가 백제적이라면, 불교는 신라적이다. 즉 불교의 불살생은 불필요한 죽음은 금하지만, 모든 죽임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을 수도 있고, 뜨거운 찻잔에 날파리가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살생을 위해 움직이지 않고, 먹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불교에서 말하는 불살생의 목적은 죽는 대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죽이는 행위를 통해 내 자신이 오염되는 부분이 본질적이다. 즉 살생할 때 발생하는 분노와 폭력에 의한 내면의 오염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불교는 타인과 다른 생명을 배려한다. 그러나 그 본질에는 다름 아닌 ‘내’가 있다. 이는 대상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변별되는 특이점이다.
불교에서 화를 내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상대를 위함인 동시에, 내 내면의 평정심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불교의 논리구조는 매우 이기적이다. 그러나 ‘대상만을 목적으로 할 때, 그 속에 과연 100%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즉, 타인을 위한 선행이 아닌, 나를 위한 선행이 오히려 더욱 충실한 선행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타인을 위해서 분노를 참거나 살생을 참는 것은 자칫 화병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한 자발적인 노력이라면, 상황은 훨씬 용이하며 최선으로 귀결된다. 이는 불교가 후일 유심주의로 전개되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살생 역시 불교는 나의 내면과 관련된 자발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런 특징은 승려에 따라 자발성의 한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절에 살다 보면, ‘방문을 열고 모기를 쫓아내는 스님’, ‘모기를 죽이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해 주는 스님’, ‘잔인하게 색출해서 죽이는 스님’ 등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 즉 자발성의 한계와 이를 이해하는 관점에 개인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맨 앞의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한다면, ‘스님의 성깔에 따라 다르다’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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