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경력 좋은 대선후보가 주로 패배
국민은 이력서 아닌 사람에 투표하기 때문
'박스 밖의 언더도그' 후보에 주목해야
로널드 레이건은 연설을 잘한 대통령인데,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 폭발 사고 후 대국민 위로 연설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 기념 오마하 비치 연설이 특히 명연설로 뽑힌다. 두 연설문을 작성한 스피치 라이터는 페기 누넌이다. 지금은 70세를 넘긴 누넌은 월스트리트 저널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는데,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의 선거를 돕기도 했다. 2007년 봄, 존 매케인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누넌은 매케인의 가능성을 낮게 보는 칼럼을 써서 화제가 됐다.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고 종전 후 영웅이 되어 돌아 온 존 매케인은 애리조나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승승장구해서 다선 상원의원이 된 탁월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런 매케인에 대해 누넌은 이렇게 썼다. "미국인들은 사람에 투표하지 이력서에 투표하지 않는다." 누넌의 말대로 탁월한 경력을 자랑하는 메케인은 2000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했고, 2008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가 되기는 했지만 자서전을 낸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했다. 이라크 전쟁과 경제위기로 공화당이 궁지에 몰린 탓도 있었지만, 자신이 국정을 보다 잘 운영할 수 있는 경력이 있음을 내세웠던 매케인이 정치 초년생 오바마에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선거 캠프를 이끌었던 켈리앤 콘웨이는 대통령을 당선시킨 최초의 여성 선거참모인데, 그녀는 트럼프 백악관에서 선임 고문을 지냈다. 콘웨이는 트럼프가 승리한 비결을 이렇게 요약했다. "힐러리는 자체가 박스였고, 트럼프는 박스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힐러리가 트럼프는 국정 운영능력이 없다고 몰아붙여서 트럼프가 언더도그(underdog·이길 확률이 낮아 보이는 약자) 처지가 됐는데, 미국인들은 언더도그를 좋아한다"고 콘웨이는 덧붙였다. 이처럼 1992년, 2000년, 2008년,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경력이 좋은 후보는 항상 패배했다. 2020년 대선에서 6선 상원의원과 부통령을 지낸 조 바이든이 당선된 것이 드문 예외라고 하겠다.
우리의 경우는 2002년 대선이 한쪽 정당이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는데, '박스 밖의 언더도그' 후보인 노무현이 승리했다. 2007년 대선은 애당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 선거였고, 2012년 대선은 국민 통합과 경제민주화를 내건 박근혜가 근소한 차이로 이긴 선거였으며, 2017년 대선은 탄핵 후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문재인이 승리한 선거였다. 그렇다면 내년 대선은 어떤 형태의 선거로 치러질 것인가?
부동산 등 문재인 정부의 실정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영 대결로 치러지는 내년 선거는 야권이 당연히 우세여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힘 등 야권이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후보 개개인이 큰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거론되는 대선 주자 중 존 매케인과 가장 닮은 후보는 정세균 전 총리라고 하겠다.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역임했으며 국회의장을 지내고 총리까지 지냈으니 경력으로 본다면 국정을 가장 잘 운영할 사람이지만 지지율은 높은 경력과는 정반대이다.
반면에 원래 '박스 밖의 언더도그'였던 이재명 지사는 그런대로 선전하고 있고 이낙연 전 총리는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야권에서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하락 모드에 접어들었지만 좋은 경력을 자랑하는 '박스 안의 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그 지지도를 온전히 흡수할지는 알 수 없다. 야권에서는 오리지널 '언더도그'인 홍준표 의원이 박스를 차고 밖으로 나올지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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