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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게 따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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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집안 곳곳의 해묵은 물건들을 버리기로 했다. “과감히 버려야지” 마음먹었지만, 막상 버릴지 말지 고민스러운 물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침 미니멀 라이프 전도사를 자처하는 블로거들이 공통적으로 앞세운 '버릴 물건의 기준'이 눈에 띄었다.
"지난 1년간 쓰지 않았다면 과감히 버려라. 버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계절이 지나도록 한 번도 쓰지 않았다면, 없어도 그만인 물건으로 판명 났다는 뜻일 테다.
이 기준을 ‘통일부’에 적용해 본다면? 1년을 훌쩍 넘게 북한과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있는데 버리는 게 맞지 않을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통일부 폐지론'을 꺼내 들었다. '작은 정부'로 가려면 어쨌든 정리돼야 할 부처들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이 대표는 통일부와 여성가족부를 지목했다. "통일부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통일에 다가가지도 않는다"는 게 그의 논리다.
맞는 말이다. 통일부가 한반도 전쟁 발발 위기를 막았다거나, 연합제니 연방제니 남북의 통일 정책 간 이견을 획기적으로 좁혀낸 역사 같은 건 없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김여정 말 한마디로 무너져 내릴 때 손 한번 쓰지 못했던 게 통일부다.
하지만 이 대표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했다. 당장 할 일 없어 보이는 통일부가 여전히 남북 간 제1의 소통 창구라는 점이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겠다며 대화 재개 시그널을 던졌다. 하루 만인 2일 조명균 당시 통일부 장관이 북측에 당국회담을 제안했다. 다시 하루 만인 3일 리선권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판문점 연락관 채널을 재개하겠다고 화답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 보이지만 ‘통통라인(통일부-조평통)’이 소통의 기본 채널임을 남북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후 조명균-리선권 채널이 대화 정국의 입구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통일부가 잘해서가 아니다. 통일부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일 당장 북한이 당국 간 회담을 열자 하면, 이산가족상봉을 준비하자 하면 누가 나설 텐가.
조평통은 "다시는 남조선과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2019년 8월 조평통 담화)"고 했다. 현 정권과 더 이상 내밀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북측의 말은 진심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조평통을 폐지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열어는 둔 것이다.
이 대표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우리 국민의 시신을 소각하는데 (통일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고도 했다. 통일부를 폐지하면, 북한에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을 것이란 뜻인가. 현 정부 대북 노선과 통일부 본연의 기능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마트에서 경품으로 덥석 받아 든 비치 파라솔은 창고 자리만 차지했지, 당최 잘 써지질 않는다. 버리는 게 맞을 듯싶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장롱 속 솜이불 역시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두기로 했다. 느닷없이 손님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집에서 자고 가라 했는데, 정작 깔아줄 이불이 없다면 얼마나 면구스럽겠나. 당장 쓸모없어 보여도 버릴 게 있고 말아야 할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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