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수산업자의 특별한 피해자들

입력
2021.07.14 04:30
수정
2021.07.14 07:5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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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31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가짜 수산업자' 김모씨 등이 핼러윈 데이 모임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김씨 회사 직원, 부장검사, 김씨, 사립대 교수, 사립대 전 이사장, 사립대 교수. SNS 캡처

지난해 10월 31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가짜 수산업자' 김모씨 등이 핼러윈 데이 모임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김씨 회사 직원, 부장검사, 김씨, 사립대 교수, 사립대 전 이사장, 사립대 교수. SNS 캡처

“선동오징어 매매사업에 투자하면 수개월 안에 3~4배로 수익을 내게 해주겠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가짜 수산업자’ 김모(43)씨가 남의 돈을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2분마다 한 번씩 사기 범죄가 일어나는 사기 공화국의 명성에 걸맞게 김씨 수중에 돈이 들어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피해자 대부분은 김씨와 첫 만남 이후 한 달 내에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을 김씨의 수협 계좌로 보냈다. 어떤 피해자는 만난 지 열흘 만에 2억 원 이상을 보냈고, 이틀 만에 5,000만 원을 이체한 피해자도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곧바로 현금으로 3억 원을 김씨에게 건넨 피해자도 있었다.

김씨가 뜯어낸 돈은 7명에게서 116억 원이 넘는다. 확인된 금액만 그렇다는 것이고, 알려지지 않은 피해액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김씨가 어떤 수법을 썼길래 100억 원이 넘는 돈을 손쉽게 가로챘을까. 도시민한테는 이름조차 생소한 ‘선동오징어’가 사기극에 동원됐다. 선동오징어는 오징어를 잡은 뒤에 배에서 곧바로 얼린 제품으로, 신선도가 높아 초콜릿 색깔로 보이는 최상급 제품이다. 오징어를 육지로 갖고 와서 얼린 육동오징어보다 등급이 높은 제품으로 분류된다. 김씨는 오징어 어획량이 해마다 줄어들어 앞으로 귀한 수산물이 될 것이니, 선동오징어를 보관했다가 비싼 값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사람들을 꼬드겼다.

생소한 사업 아이템에, 얼핏 봐도 김씨 설명이 어설프고 허점이 많아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거액을 내놨다. 김씨에게 독도새우와 대게, 전복과 과메기는 받아 본 적이 있지만, 정작 선동오징어는 받아 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더구나 사기꾼 꾐에 절대 안 넘어갈 것 같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김씨를 특히 믿었다. 수협 조합원 가입비 명목으로 1억 원이 필요하다는 김씨 말을 믿고, 가짜 서류에 사인한 뒤 최근까지도 자신이 조합원인 줄 알았던 피해자도 있다.

김씨 주변에서 이 같은 장면을 자주 목격한 측근들의 말은 놀라울 정도였다. TV에서만 보던 유명 정치인들과 언론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저널리스트들이 아들뻘 동생뻘 되는 김씨를 각별히 챙겼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검찰과 경찰 간부들, 고고함으로 먹고산다는 대학 교수들까지 김씨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가짜 수산업자 김씨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을까. 지방대 법대를 중퇴한 김씨는 변호사 사무장을 가장해 형편이 어려운 학교 동창들의 등골을 빼먹던 잡범이었다. 지능범도 아니었고 고학력자도 아니었으며, 영화에 이따금 등장하는 ‘정의로운 사기꾼’은 더더욱 아니었다.

피해자들의 부주의가 김씨의 범행을 도와준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를 탓하거나 사기꾼과 어울린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해선 안 된다. 나쁜 놈은 가해자인데, 피해자나 주변 사람들을 탓하다 보면 범행을 합리화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짜 수산업자와 어울린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 쉬 들지 않는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가벼운 이들의 처신 때문이다.

김씨 측근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김씨한테 넘어오는 걸 보고 어이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웃겨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니 한심하다 못해 측은한 마음까지 들 지경이다.


강철원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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