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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싱가포르에 뒤처진 27년… 첫 한국형 산단, 추격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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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국일보>
"한국 투자기업을 우대한다 해서 왔는데, 완제품을 수출 가능 목록에 등록하는 게 너무 힘들다. 도대체 성(省)정부는 뭘 하자는 거냐."
지난해 11월 베트남 북부 A성이 주최한 투자 설명회는 한국 기업인의 이 같은 한마디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베트남 당국자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 질문이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베트남 기획투자부 고위 관료와 인민위원장의 표정이 순간 굳은 건 당연했다. A성 투자총괄국장이 "한국 등 외국의 기업 행정 실무를 돕기 위한 원스톱 서비스 센터를 최근 만들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장내에선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는 목소리만 이어졌다. 중앙정부와 지방성의 법 시행 불일치, 약속된 투자 인센티브 지급 연기, 세관 갑질 등 한국 기업의 어려움은 경영 활동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렇다고 현지 한국 기업들의 누적된 고충을 모두 베트남 특유의 주먹구구식 행정체계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자국 기업의 해외 투자를 방관하고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간과한 한국 정부 역시 현장의 혼란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올 7월 기준 8,500여 곳에 달하는 베트남 내 한국 기업 대부분은 '맨땅에 헤딩' 수준으로 현지에 진출했다. 본국의 일관된 조율이 없다 보니 당연히 진출 지역이 산개됐고 경영 리스크 관리도 각자도생식으로 이뤄졌다. 특히 북부의 박닌과 박장성, 남부의 호찌민과 빈즈엉성 등 이미 궤도에 오른 공단에 진입하지 못한 후발 기업들의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말도 잘 안 통하는 현지 관청을 찾아 통사정을 해야 하고, 도움을 가장해 접근한 현지 사기꾼들에게 피해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같은 베트남 땅에서 경쟁 중인 일본과 싱가포르 기업들의 상황은 정반대다. 이들은 굳이 현지 당국을 직접 찾을 일이 없다. 이미 자국 정부가 주도해 건설한 특화 산업단지에 행정지원센터와 정부 파견 기관들이 함께 입주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산단에는 자국민 주재원을 위한 배후 주거단지는 물론, 도서관까지 기본 옵션으로 마련돼 있다. 게다가 금융·법률·세무·회계 분야 업체들도 들어와 기업 활동의 각종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장기 전략을 기반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대표적 국가는 일본이다. 1994년 하이퐁의 노무라 산단에 45개 자국 기업들을 진출시킨 데 이어, 그 이후에도 하노이와 흥옌성에 탕롱1·2단지(1997년·2009년) 등을 순차적으로 건설했다. 이들 산단은 입주 회사의 95% 이상이 일본 기업으로, 사실상 베트남 내 '작은 일본'이다. 온갖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 기업은 자국 산단들 중에서 각자한테 유리한 입지 조건이 어느 곳인지만 따져보면 되는 셈이다.
싱가포르의 베트남 진출도 철저한 계획하에 이뤄졌다. 일본보다 자국 기업 수가 적은 싱가포르는 이를 감안해 베트남 정부와의 협업부터 시작했다. 싱가포르가 자금과 투자 노하우를 제공하면 베트남이 부지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상생 전략은 베트남-싱가포르 산업단지(Vietnam-Singapore Industrial Park·VSIP) 합작법인으로 꽃을 피웠다. VSIP는 1994년 빈즈엉성을 시작으로, 박닌성 1·2단지(2007년·2019년), 하이퐁(2008년), 꽝응아이성(2012년), 응예안성(2015년) 등 6개 산단을 더 건설했다. 이들 산단엔 중국·미국·말레이시아·홍콩·대만의 기업 164곳도 자리 잡았다. 한국 역시 21개 기업이 VSIP의 시스템을 유료로 이용 중이다.
양국의 산단 성공은 베트남과의 추가 사업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산단을 통한 현지 고용 창출 효과를 무기로 최근 하노이 인근 신도시 사업을 수주했다. 싱가포르 역시 국부펀드까지 나서 빈즈엉성 등에 9개 산단을 추가 건설하면서 배후 도시 개발도 함께 따냈다.
반면 한국은 실패의 역사만 남겼다. 사실 한국도 1995년과 2007년 각각 하노이와 박장성에 100헥타르(1㎢) 규모의 한국형 산단 건설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하노이 산단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박장성 산단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를 넘지 못하고 전면 백지화됐다.
산단 개발 선두 주자들이 베트남에 진출한 지 27년이 흐른 지난 7일, 한국은 뒤늦은 추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하노이와 동쪽을 접한 흥옌성 리트엉켓시에 첫 한국형 산단 조성을 시작한 것이다. 흥옌 산단은 베트남뿐 아니라 한국 공공부문이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한 최초의 현지화 사업이기도 하다.
흥옌 산단의 사업 주체는 VTK(Vietnam to Korea) 합작법인이다. VTK는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60%의 투자 지분을 보유했다. 나머지는 베트남 중견 건설기업인 에코파크사(社)의 TDH에코랜드가 25%, 한국의 KBI건설(10%)과 신한은행(5%)이 각각 갖고 있다. 흥옌 산단에는 내년 12월까지 143헥타르 규모의 클린 산단 구역이 먼저 조성되며, 이후 270헥타르 규모의 2차 산단이 건설된다. 또 노동자들을 위해 산단 내에 다양한 주거 및 복합 지원시설 등도 들어설 예정이다.
흥옌 산단의 최대 강점은 이미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의 연계성이다. 북쪽으로는 박닌성 등의 삼성전자와 협력업체들이 있고, 남쪽으론 닌빈성에 자리 잡은 현대차 생산공장이 있다. 동쪽으로도 하이퐁에 진출한 LG전자와 가깝다. 이에 더해 흥옌 산단은 하노이-하이퐁 고속도로와 박닌과 닌빈으로 이어지는 고속국도가 모두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한국형 산단 역시 경쟁국처럼 진출 예정 기업의 초기 사업 리스크를 미리 흡수한 상태다. 최대 난관은 지난해 초 베트남 중앙정부의 '산업단지 및 경제구역 관리에 관한 계획법' 개정이었다. 흥옌 산단 등 기존에 진행되던 성 단위 규모의 투자 사업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내용이 여기에 담겼던 것이다. 3년에 걸친 준비가 사실상 무효가 되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VTK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베트남 국회 상무위원회, 총리실 등과 지속적으로 만나 지난해 6월 흥옌 사업의 예외 승인을 결국 이끌어 냈다. 사업을 한국 공공부문이 주도하는 점, 2019년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양국 중점 협력 사업으로 흥옌이 언급된 사실 등을 적극 피력한 결과다. VTK 관계자는 "민간 기업이었다면 사업을 접거나 속절없이 베트남 측 결정만 기다려야 했을 것"이라며 "산단 조성 이후에도 흥옌성 투자관리위원회와 직접 접촉 채널을 유지해 기업 리스크 관리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베트남에 제2, 제3의 자체 산단 건설에도 나선다. 유력한 후보지는 하이퐁과 중부의 후에다. 미중 갈등 이후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남하하는 한국 및 글로벌 기업들이 여전히 많아 산단 사업 실패 가능성은 낮다는 게 현지의 중론이다.
베트남 도시 개발의 큰 흐름이 '스마트 시티'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것도 한국엔 호재다. 지난 2월 출범한 베트남 새 정권은 하노이와 호찌민에 스마트 시티를 건설해 이를 첫 성과로 내세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베트남은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도시를 건설한 경험이 전무하다. 사업 추진도 더딘 게 사실이다. 이미 60여 곳에 스마트 시티를 조성한 한국의 기술이 역전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베트남도 한국의 도전을 적극 유도하고 있다. 베트남 건설부 차관과 하노이 부시장은 8일 윤성원 국토교통부 차관을 만나 한국의 스마트 시티 투자·기술 전수 의향을 재차 확인했다. 현지 건설업계 관계자는 "일반 산단이 대거 들어서기 시작한 90년대 중반과 비슷하게, 최근 베트남에 스마트 시티 개발이라는 또 다른 물결이 크게 일고 있다"며 "K스마트 시티 기술을 가진 한국이 이번 기회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은 변수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다. LH 내부 비리로 악화한 여론 탓에, 최근 정치권에선 "큰돈이 들어가는 해외 건설투자사업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모국 소식에 한국 기업인들은 침울하다. 하노이의 한 법인장은 "정권을 누가 잡느냐와 상관없이, 한국 기업들은 앞으로도 멈춤 없이 해외에서 생산활동을 해야 한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국익을 창출하는 자국 기업을 보듬는 건 정치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라는 영역에 속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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