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D-6개월... 기업은 오너 보호 골몰, 현장에선 면피성 대책도

입력
2021.07.12 17:00
수정
2021.07.13 15:41
24면
구독


편집자주

이왕구 논설위원이 노동ㆍ건강ㆍ복지ㆍ교육 등 주요한 사회 이슈의 이면을 심도 있게 취재해 그 쟁점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주요 이슈의 주인공과 관련 인물로부터 취재한 이슈에 얽힌 뒷이야기도 소개합니다.


지난달 19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중대재해 노동자 합동추모제'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9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중대재해 노동자 합동추모제'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안전ㆍ보건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가 사망 등 중대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시행이 6개월가량(2022년 1월 27일) 남았다. 12일 시행령 입법 예고를 전후해 경영계는 처벌 수위 예측이 불가능한 졸속 입법이라는 입장을, 노동계는 5인 미만 사업장이 배제된 누더기 입법이라며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노사 모두 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물밑에서는 법 시행을 앞둔 조용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산재 기업들 조직개편ㆍ하청 분리 등 정중동

“우리 회사는 몇년 전부터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다. 다른 회사들도 법안의 파급효과를 놓고 조직 개편 등을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

전문경영인이 있는 한 대형 건설회사 관계자가 전한 최근 건설업계 분위기다. 특성상 산재 발생을 피할 수 없는 건설ㆍ화학 분야 기업들은 올초 중대재해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안전분야 고위 책임자 임명, 안전조직 개편 등 대비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올해 1분기에만 3명의 산재사망자가 발생해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을 받은 태영건설은 안전보건위원회를 신설했고, 최근 10년간 연평균 5명의 산재사망자가 나와 역시 특별근로감독을 받은 대우건설이 최고경영자 직속 품질안전실을 만드는 등 최근 중대재해자가 여러 명 발생한 기업들은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원청업체가 ‘실질적으로 지배ㆍ운영ㆍ관리하는 사업장’, 즉 하청업체에 대한 원청업체의 안전ㆍ보건관리 의무가 이 법에 명시되면서 기술적으로 하청업체와의 관계를 분리하려는 원청업체들의 움직임도 있다. 대기업들은 주요 하청업체에 자신들이 보유한 주요 장비를 무상대여하는 방식으로 협력을 끌어내거나 종속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 경우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 실질적으로 지배ㆍ운영ㆍ관리하는 것으로 해석돼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산재 책임을 물게 될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몇몇 대기업들은 최근 하청업체에 자신들의 장비를 장기할부 형식으로 매각하거나 계약관계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법망 회피를 시도하고 있다.

전기ㆍ가스ㆍ분진 등에 의한 산재예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건설ㆍ화학 등 전통적 산재 다발 기업들을 규율하는 산업안전보건법과 달리 중대재해법은 모든 사업 분야가 적용 대상이다. 여기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같은 ‘중대시민재해’까지 처벌대상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산업안전에 관심이 적었던 유통, 정보기술(IT) 등 비제조업 기업들도 이 법의 향배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노무관리, 산업안전 문제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지난달 물류센터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의장직을 사임한 김범석 쿠팡 창업자의 행보가 중대재해법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법무법인 세종의 김동욱 변호사는 “산재가 다발하는 건설업체 등은 이미 산업안전 관련 조직이 갖춰져 있어 법률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면서 “반면 중대재해법에 제품 관리상 결함에 의한 재해도 처벌하겠다는 규정이 포함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을까 우려하는 유통업계에서 연초부터 공세적으로 문의를 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유통이 주력인 롯데그룹은 지난 1일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열고 3분기 내에 80여 개 모든 계열사에 안전관리 조직을 만들고 이 조직을 대표이사 직속에 두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모호한 법 조문과 높아진 경영자들의 형사처벌 가능성 때문에 이 법이 산재예방이라는 입법목적 달성보다는 법률비용만 증가시켜 ‘변호사 복지법’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초기부터 나왔던 것도 사실. 실제로 김&장, 태평양, 율촌, 세종 등 주요 법무법인들은 중대재해법과 관련된 전담팀을 꾸려 기업들과 접촉하거나 고용부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과 세종은 각각 최근 고용부 산재예방국장 출신 변호사와 전직 관료를 고문으로 영입했고 산재업무를 담당했던 일선 고용노동청의 중간간부들도 주요 법무법인들의 영입대상 물망에 올라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철 변호사는 “이 법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 포인트는 역시 ‘오너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라며 “시행령이 공개된 만큼 하반기에는 기업들의 구체적인 자문 수요가 더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동욱 변호사는 “법 시행 후 초기에는 고용부가 법을 강력히 집행하려 할 것”이라며 “기업들은 첫번째 케이스가 되지 않으려 몸을 사리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반면 법무법인들의 이런 움직임이 ‘공포마케팅’이라는 지적도 있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는 “산안법이 개정됐지만 여전히 산재사건 벌금이 수백만 원 정도인 걸 봐도 중대재해법 역시 ‘태산명동서일필’로 결론날 가능성이 크다”면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백방으로 노력해 입법이 됐는데 혜택은 로펌들이 챙기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시각물_최근 5년간 산재 사고사망자

시각물_최근 5년간 산재 사고사망자


중소기업 불안 속 관망… CCTV 설치 등 책임전가 정황도


그나마 대형 법무법인의 조력을 받거나 탄탄한 법무조직을 갖춘 대기업들은 나름대로 법 시행을 준비하고 있지만 당장 법 적용 대상이 되거나 시행 3년 뒤 적용을 받게 되는 중소규모 기업들은 불안감 속에 상황을 관망하는 분위기다. 양옥석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작은 기업 대표들 대부분은 중대재해법이 제정됐다는 사실, 사망사고가 나면 자신들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 정도만 알지 자세한 법 내용은 모르는 깜깜이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기중앙회 부산울산지역본부가 201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6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대재해법에 대해 ‘준비ㆍ대응 못함(36.3%)’, ‘전혀 준비ㆍ대응 못함(11.4%)'으로 응답 기업 절반가량이 손을 놓고 있었다. 사업주의 형사처벌 가능성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우려는 예상대로 컸다. 수도권 북부지역에서 11년째 중소제조업체(종사자 17명)를 운영하는 A(48)씨는 “대표자가 구속되면 중소기업에선 인사ㆍ회계 결재를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며 "그렇다면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대재해법 제정을 계기로 노조가 회사 측에 산업안전 인프라 강화를 강하게 요구해 얻어낸 사례도 있다. 경기 양주시에 소재한 동파이브 생산업체 능원금속은 창립(1986년) 이후 산재 사망사고가 4건 발생한 회사(종사자 약 420명)다. 2019년 설비를 청소하던 노동자가 기계 오작동으로 압사했지만 조업 중지명령도 내리지 않는 등 사측 관계자가 사고를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는 태도에서 촉발돼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조는 올해 사측과의 협상에서 안전보건대책 강화를 요구했다. 그 결과 2분기부터 중대재해법 시행과 관련한 노사협의체를 운영하기로 했고 산업안전관리기사 외에 조합원 중 1명을 현장을 점검하는 명예산업안전감독관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최성돈(52) 노조위원장은 “노동자 사망을 '늘 있는 일'로 보던 회사의 태도가 중대재해법 이후 산재문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경기 남양주시 소재 조명장치 제조ㆍ유통 업체(종사자 약 320명)인 일신비츠온도 올해 산업안전기사, 산업보건간호사 등을 채용하고 보건관리실을 만들었다. 이 회사 노조 조용식(44) 위원장은 “단체협상을 할 때 회사 측에 중대재해법 위반에 따른 강력한 제재를 인식시키는 데 진력했고, 사측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중대재해법의 순기능이다.

반면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산재사고가 노동자 책임이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회사들의 다양한 면피성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된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기업의 안전 점검을 하시는 분들에게서 회사들이 폐쇄회로(CC)TV 설치를 늘리거나, 노동자들로부터 ‘문제가 발생하면 경영자가 아닌 노동자의 과실’이라는 내용의 안전규칙 서약서를 받는 사업장이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고 전했다. 불필요한 서류작업만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상헌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홍보팀장은 “작은 건설공사 현장에서는 소장들이 안전보건 조치를 다했다는 서류작성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면서 “소규모 사업장들은 사실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라고 전했다. 근본적인 안전대책 마련에 투자하는 회사도 있지만 과실책임을 피하려는 얕은 수 짜내기에 골몰하는 사업주들도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음에도 오히려 산재사망자가 전년보다 증가했듯 중대재해법이 만들어졌지만 산재사망자는 크게 줄지 않고 있다. 공식통계가 집계된 지난 3월 기준 산재사망자는 238명으로 전년(253명)보다 소폭 줄긴했지만 50인 미만 사업장(제조업) 사망자의 증가, 추락과 끼임 등 후진국형 산재사고 증가 등 구조적 취약점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용자들의 안전인프라 구축 투자, 노동자들의 안전의식 제고, 정부 지원 등의 3박자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중대재해법도 산재예방이나 최소화에 별반 효과가 없는 형식적인 법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중대재해법은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짧은 논의 끝에 만들어져 ‘엄벌주의’에만 치중된 측면이 있다”면서 “산재예방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실질적으로 산재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구의역 김군 산재시민법정'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구의역 김군 산재시민법정'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왕구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