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내가 후임"… 대통령 피살 뒤 권력투쟁, 혼돈의 아이티

입력
2021.07.11 09:24
수정
2021.07.11 17:3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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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못한 총리 지명자가 임시 총리에 반기
3분의 1뿐인 상원은 자체 임시 대통령 지명
입 연 영부인 "말도 안 시키고 남편에게 총알"
"용의자들은 경호원, 암살 배후 따로" 의혹도

8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한 경찰서 앞에서 시민들이 경찰에 체포된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암살 용의자 2명과 현장에서 숨진 용의자 2명의 시신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AP 연합뉴스

8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한 경찰서 앞에서 시민들이 경찰에 체포된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암살 용의자 2명과 현장에서 숨진 용의자 2명의 시신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AP 연합뉴스

무장 괴한들에 의해 대통령이 암살된 아이티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이 권력을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만 3명이다. 당초 9월로 예정돼 있던 대통령 및 의원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 알 수 없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남편이 살해될 당시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아 오던 대통령 부인은 사건 이후 처음 육성을 공개했다.

1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7일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곧바로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가 아이티 국정 책임을 이어받았지만 최소 두 명이 승계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상태다.

조제프는 올 4월 외교장관 자리에 있다가 조제프 주트 전 총리의 돌연 사임에 임시 총리로 임명된 인물이다. 아이티는 7일 관보 특별호를 통해 새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현 총리와 내각이 통치한다고 밝혔고, 마티아스 피에르 선거장관도 9월 26일 대선 및 총선 때까지 조제프 총리가 국정 책임자 역할을 맡는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대통령 암살 직전 지명된 총리가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을 촉발했다. 모이즈 대통령 피살 이틀 전 조제프 총리를 대신할 새 총리로 지명된 의사 출신 아리엘 앙리는 공식 취임 선서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이티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고 그에 부합하는 새 정부를 꾸리는 중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새 내각이 정파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기존 선거위원회를 새로 구성할 텐데 이 위원회가 새로운 선거일을 정할 것이라고도 했다. 예정된 선거일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의회도 딴생각을 품고 있다. 전날 아이티 상원은 조제프 랑베르 상원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랑베르 의장도 정당성을 주장할 처지는 아니다. 정국 혼란으로 선거가 제때 치러지지 못하는 바람에 하원의원 전체의 임기가 끝났고, 정원 30명 중 10명밖에 남지 않은 상원도 임시 대통령 선출 가능 정족수에 미달한다.

이런 난맥상의 빌미는 헌법이 제공했다. 현재 아이티는 사실상 헌법이 하나가 아니다. 2012년에 헌법이 개정됐지만 프랑스어 내용에만 반영되고 또 다른 공용어인 크레올어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두 헌법을 모두 적용해도 후계자를 찾을 수 없다. 2012년 헌법에는 의회가 투표를 통해 임시 대통령을 뽑는다고 돼 있지만, 지금 아이티에 하원은 없고 상원은 3분의 1만 남았다. 1987년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대법원장이 권한을 승계한다고 규정하는데 르네 실베스트르 대법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최근 사망한 터여서 헌법을 적용할 대상이 없다.

모이즈 대통령 암살 사건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영부인 마르틴 모이즈 여사는 이날 영부인 공식 트위터에 크레올어로 된 음성 메시지를 올려 “눈 깜짝할 사이 괴한들이 집에 들어와 남편에게 한마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총알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모이즈 여사의 육성 공개는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만이다. 그녀는 “나는 신 덕분에 살았지만 남편을 잃었다”며 “이 나라가 길을 잃게 내버려둘 수 없다. 남편의 피를 헛되이 흘려 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모이즈 대통령은 7일 새벽 사저에 침입한 괴한들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모이즈 여사는 총상을 입은 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현재 치료받고 있다. 아이티 당국에 따르면 암살에 가담한 괴한은 모두 28명으로, 콜롬비아인이 26명이고 아이티계 미국인이 2명이다. 17명이 체포됐고 3명은 사살됐으며 나머지 8명은 당국이 쫓고 있다.

암살 동기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암살범으로 지목된 콜로비아인들은 살해 협박을 받던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채용됐고 실제 암살의 배후는 따로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모이즈 대통령 살해범들은 당국에 구금된 콜롬비아인들이 아니라는 얘기가 야권을 중심으로 확산 중이라며 암살 배후에 자기들 이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한 기득권 재벌이 있다는 전직 국회의원 알프레도 앙투완의 주장을 인용했다.

권경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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