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4단계가 '6시 통금'?…통금, 네 정체는 뭐니

입력
2021.07.10 12:00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통금' 빗대는 표현 등장
통금, 과거 정치적 이유로 기본권 침해한 조치
1945년 미 군정이 서울·인천 대상으로 첫 시행
서울올림픽 유치로 1982년 1월 6일 통금 해제


'사실상 통금' '코로나19 통금'

1979년 10월 18일 통금 연장에 따라 열차운행 시간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공고문이 붙은 부산역 대합실. 역에 나온 시민들이 공고문을 읽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12일부터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4단계로 올라갑니다. 이에 따라 수도권에선 오후 6시 이후에는 3인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되는데요. 오후 6시 이전에는 네 명까지, 그 이후에는 두 명만 모일 수 있게 됩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6시 이후 통금'이 추진된다고들 합니다.

통금은 그만큼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는 뜻에서 꺼낸 단어지만 일부에서는 정부의 고강도 거리 두기 정책을 비꼬면서 결국 방역 대책의 실패를 비판하는 뜻을 담아서 쓰고 있는데요.

곳곳에 등장하며 화제의 단어가 된 통금은 무슨 뜻일까요. 통금은 정부가 정한 시간부터 거리를 다니지 못하게 기본권을 침해하는 조치인데요.

그런 뜻이라면 수도권 거리 두기 4단계는 사적 모임은 3인 이상 불가라 어렵더라도 이동이나 거리 통행은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통금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군사 정권 시절의 상징이었던 통금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①야간통행금지, 1945년 미군정이 처음 실시

1982년 1월 5일 37년 된 '통금'이 사라지는 역사적인 첫밤을 서울 시민들은 소란없이 보냈다. 0시 9분을 알리는 시청 전광시계판 앞에 시민들은 느긋이 활보했고 택시도 한가롭게 움직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통금은 '야간통행금지'의 줄임말입니다. 정부가 지정한 시간에는 거리를 다닐 수 없게 한 고강도 조치인데요. 국민의 생명 보호와 치안 유지란 이유로 시행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옥죈 조치입니다.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고 규탄 시위가 많았던 만큼, 이를 봉쇄하려는 의도가 담겼죠.

전남대 5·18연구소가 2018년 3월에 발행한 '1945~1982년 야간통행금지, 안전과 자유 그리고 재난'(저자 이행선)이란 제목의 논문을 보면 통금의 역사가 자세히 나오는데요.

통금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7일 서울과 인천에 처음으로 실시됐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 국민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공포된 맥아더 장군의 군정포고 제1호에 의거한다'며 통행을 선포합니다.

첫 통금은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이동이 제한됐죠. 서울과 인천을 대상으로 적용된 통금은 1950년 7월 8일 한국전쟁으로 전국에 확대 시행됩니다.

1954년 4월에는 아예 통금이 법에 들어갑니다. 통금 조항이 들어간 '경범죄처벌법'이 제정됐는데요. 이전까지는 군사적 조치로 시행된 것이라면, 이때부터 통금에 사법적 근거가 부여됩니다.

저자는 '1950년대 반공체제에서 국가 안보와 치안 유지를 위한 기본권 제한은 불가피한 희생으로 간주됐다'고 평가했는데요. 전쟁이란 비상 상황이었던 만큼, 기본권이 일부 제약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죠.


②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유지에 이용

1960년 4월 14일 경남 마산 시내 모습으로 통금 위반자들을 버스에 실어 이송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동권과 기본권 침해가 길어지다 보니 불만 여론도 서서히 커졌습니다. 1956년에는 성난 민심을 달래고자 이승만 정권은 통금 폐지를 검토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정권은 사회 통제를 이어가기 위해 오히려 '풍기 문란 단속'이란 근거를 달며 통금을 강화합니다.

그런 통금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더 강력해집니다. 1961년 5월 16일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통금을 실시하는데요. 박정희 정권은 통금을 정권을 유지하는데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1962년 5월 5일부터 16일 동안 야간 통행을 허용하고, 같은 해 12월 24일부터 10일 동안 잠시 통금을 해제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은 통금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왔는데요.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비상계엄령이 또 다시 선포되며 통금 시간은 오후 10시가 됐고,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 부산의 통금 시간을 연장했죠.


③서울올림픽 유치 계기로 전두환 정권 없애

1981년 9월 30일 정주영(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는 순간 웃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중반 이후 경제 활동을 이유로 통금 해제 요구가 점차 힘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부 때 '1988 서울올림픽' 유치가 통금 해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전 세계의 시선은 한국에 쏠리게 됩니다. 그런데 정부는 선진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국민들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줄 경우 국제적 스포츠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에 따라 1981년 11월 집권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정부에 통금 해제를 건의했고, 같은 해 12월 15일 국회에서 '통금해제안'이 만장일치로 본회의를 통과합니다. 법 개정으로 1982년 1월 6일 0시부터 36년 4개월 동안 시행된 통금은 완전히 해제됩니다.


④'빨리빨리' 문화 확산 계기…여러 부작용 남겨

한국일보 1982년 1월 5일 자.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통 통금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라디오 방송에선 매일 밤 10시 통금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습니다"란 음성이 나오면 모두 서둘러 귀가 준비를 했죠.

통금 시간인 자정이 되면 곳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방범 대원들이 호각을 불며 단속을 벌였습니다. 통금을 어겨 방범대원에게 잡히면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내거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죠.

통금은 갖가지 부작용과 사회적 폐단을 남겼는데요. 통금 시간 전후로 위험 운전을 하는 기사들이 늘어 교통사고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또 택시 기사들이 통금 직전 바가지 요금을 달라고 하거나 심지어 금품을 뺏는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고 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격상 소식이 발표된 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에서 관계자들이 영업시간 단축 안내문을 붙히고 있다. 뉴스1

'빨리빨리' 문화가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 잡게 됐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귀가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서둘러 끝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거나, 짧은 시간에 술을 많이 마셔야 해 폭탄주 같은 폭음 문화도 횡행했다고 합니다.

통금이 부패에 악용되는 일도 있었죠. 통금 조치를 어긴 뒤 관련 처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경찰에 부정하게 돈을 주고, 경찰이나 방범대원은 반대로 이를 이용해 뒷돈을 챙겼다고 합니다.


류호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시시콜콜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당신이 관심 있을만한 이슈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