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건강하시기를

입력
2021.07.09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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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 현미를 물에 불려놓고 현관문을 나섰다. 새벽 5시 반, 동이 트고 있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는데 오른쪽 어깻죽지가 찌릿찌릿했다. 나흘 전 걸린 담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4월 초 이 산길을 걸은 뒤 꼬박 석 달 만이다. 몸이 말썽을 부린 탓이다. 지난해 이맘때 손가락 관절염 때문에 병원을 찾은 이후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는 약을 꾸준히 먹었다. 소염제와 항생제, 중간중간 스테로이드제가 섞였다. 한때 젓가락질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하던 손가락 통증은 약을 먹은 이후 잦아들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만큼 회복됐다. 문제는 다른 데서 나타났다.

봄꽃 피는 시기에 맞춰 견디기 힘든 두통이 찾아오더니, 밤만 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통제를 먹으며 며칠을 버티다가 일 년 동안 내 손가락을 맡겨온 의사 선생님께 상담했다. 에두르지 않고 약의 부작용이라고 말했다. 좀 더 세밀한 검사와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그분은 나를 인근 종합병원 통증의학과 전문의에게 인계했다. 엑스레이와 CT를 찍고 몇 차례에 걸쳐 피를 뽑는 일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병원을 들락거리며 책상 앞에 놓인 원고를 보던 어느 날, 엉덩이 아래쪽에서 벌레 물린 것처럼 시작된 가려움증이 달걀만큼 커다란 염증으로 변해버렸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몸의 저항력이 떨어진 탓에 염증이 순식간에 퍼져나갔을 거라고 의사는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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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함이고 부끄러움이고 다 내던진 나는 수술대에 엎어진 채 어금니를 앙다물며 고통을 참아보려 애썼다. 의사와 간호사가 마취하지 않은 상처에서 고름을 짜낼 때는 그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고 한기까지 느껴졌다. 의사 선생님은 참으로 친절했다. 짜내도 짜내도 나오는 피고름 때문에 진땀을 빼면서도 연신 “아이고,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이걸 이번에 다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 또 도질지 몰라요. 조금만 참아줘요. 정말 미안해요”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또 다 죽어가는 소리로 ‘아녜요, 더러운 치료 하시게 만들어서 제가 정말 죄송해요’라고 웅얼거리는 진풍경이 10분 넘게 연출됐다.

의사 선생님이 초기 처치를 잘해준 덕에 염증은 덧나지 않았다. 하지만 엉덩이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자리잡을 때까지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생활해야 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고역이었다. 책상 앞에 죽치고 앉아 원고를 검토하는 일이,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행위인지 절감했다. 걷는 일마저 자유롭지 못해 긴 시간 집 안에서만 서성이다 보니 정신 건강까지 훼손되지나 않을까 슬슬 걱정스러워질 지경이었다.

한 시간 남짓 산행을 하는 동안 피부에 송송 땀이 맺힐 때의 상쾌함이 낯설고 짜릿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엄중한 시절을 경고하는 뉴스가 아침부터 계속됐다. 퉁퉁 불어난 현미를 밥솥에 안치며 마음을 다잡는다.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해. 흰쌀밥만 고수해온 나에게 친구와 가족들이 각자 보내준 음식물 꾸러미에 이 발아 현미가 세 봉지나 들어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에 선한 그 마음들 덕에 지나간 봄날의 아픔을 견뎌낸 것 같다. 그러니 모두 건강하게 엄중한 이 여름을 견디시라고 인사 전한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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