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폰을 위한 항변

입력
2021.07.0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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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책상 서랍 속에서 뒹구는 LG폰들. 왼쪽부터 2G 끝물의 사이언, 나름의 성공을 거둔 스마트폰 G3, 지금도 사용 가능한 G6와 V30. 사진을 촬영한 폰은 벨벳이다.

책상 서랍 속에서 뒹구는 LG폰들. 왼쪽부터 2G 끝물의 사이언, 나름의 성공을 거둔 스마트폰 G3, 지금도 사용 가능한 G6와 V30. 사진을 촬영한 폰은 벨벳이다.

이별의 시간은 정해졌다. 길어야 2년이다. 사후지원 기간보다 디스플레이가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달렸다. 신제품은 더는 나오지 않으니 지난해 연말 구입해 지금 쥐고 있는 벨벳이 마지막 LG폰이다.

20년간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던 LG폰을 영원히 놓아줘야 한다. 예감은 했어도 원하지 않았던 이별이다. 2015년 2분기부터 2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LG폰은 결국 사망선고를 피하지 못했다.

LG폰과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이 카이(Khai) 브랜드를 출시했을 때니 2000년쯤으로 기억된다. LG전자의 카이 전용폰 디자인이 눈에 박혔다. 매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LG폰을 구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바로 집어 들었다. 물론 당시 잘나갔던 노키아나 모토로라 휴대폰보다 저렴한 것도 이유이긴 했다.

이 폰을 몇 년 썼다. 고장이 나야 바꿀 텐데 튼튼했고 ‘귀차니즘’도 한몫했다. LG폰의 사용자환경(UI)에 익숙해지니 다른 제조사로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후 3세대 아이폰을 회사에서 공동구매하기 전까지 2세대 이동통신(2G)과 3G 시대의 근 10년을 LG폰과 함께했다.

아이폰에 이어 4G(LTE) 초기 삼성 갤럭시로도 한 번 외도를 했지만 인연의 끈은 질겼다. 친구가 창업한 매장에서 호기롭게 제값을 다 주고 산 갤럭시S3를 석 달 만에 취중 분실했다. 24개월 할부였다. 할부금이 매달 빠져나가 새 폰을 못 사고 집에서 굴러다니던 폰을 쓸 수밖에 없었다. LG 옵티머스였다. 이후 옵티머스 뷰와 G3, G6를 거쳐 벨벳까지 LG폰을 놓지 못했다. 아버지의 임종과 딸의 첫 걸음마를 비롯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모두 LG폰 메모리에 담겼다.

삼성과 아이폰이 시장을 주름잡는데 LG폰을 들고 있으면 항상 같은 질문을 받는다. 긴 대답은 필요 없다. 취향에 맞고 쓰기 편하면 그만. 벨벳만 해도 플래그십 스마트폰이란 타이틀이 무색하게 가격 대비 스펙이 다소 딸리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데 별 불편은 없다.

한때 초콜릿폰과 프라다폰으로 화려한 날을 보낸 LG폰에 스마트폰 시대는 끝이 없는 암흑의 터널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 진입부터 늦었지만 설령 빨리 시작했더라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애플처럼 독자 운영체제(iOS)나 앱 생태계, 삼성처럼 강력한 모바일 반도체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LG폰의 도전 정신은 빛났다. 4대 3 화면비(옵티머스 뷰), 후면 가죽커버(G4), 모듈형 폰(G5), 하이파이 쿼드 덱(V20), 스위블 폰(윙)은 모두 세계 최초다. 끝내 출시되지 못한 비운의 롤러블 폰도 마찬가지다.

G6로 정점을 찍은 극한의 내구성도 인정해줘야 한다. 3년을 쓰고 처박아 둔 G6는 여전히 멀쩡해 유심 카드만 꽂으면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 G6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신봉선이 실수로 50m 아래로 떨어뜨렸는데도 끄떡없었던 그 폰이다.

도전이 통했다면 결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매번 한 끗이 모자랐다. 출시 초반 반짝 기대를 모으다 뒷심을 내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졌다. 그래도 LG폰 마니아들은 애증 속에서 응원했다. 언젠가 한 번은 터지리라 믿었다. 이젠 부질없는 일이지만 26년을 버틴 LG폰의 잔향은 오래 갈 듯하다. 그게 미련일지 추억일지는 몰라도.

김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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