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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나이키, 개발한 자재 가져가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사형선고 당한 셈”

입력
2021.07.08 04:30
수정
2021.07.08 18:3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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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텍스타일 대표 인터뷰]

"이게 우리가 개발한 '미라클 와플'이라는 특수자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키 아닌 다른 업체에 팔 수가 없어요. 나이키가 특허를 갖고 있거든요. 나이키는 우리와 거래 끊고 다른 업체에 이 자재를 얼마든지 개발하라고 시킬 수 있죠."

26년간 나이키에 농구화용 겉면(외피)과 내피 등을 납품한 석영텍스타일의 김일호(가명) 대표는 책상 위에 직접 개발한 미라클 와플을 펼쳐 놓았다. 천 표면에 올록볼록한 원 모양의 문양(와플)이 제각각 다른 크기로 가득하다. 각각의 와플은 모양도 보기 좋지만 늘어나며 충격을 흡수해 찢어지지 않도록 해준다.

김일호(가명) 석영텍스타일 대표가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직접 개발한 미라클 와플 자재와 이를 이용해 만든 나이키의 '나이키 어댑트 BB2.0' 농구화(왼쪽)를 보여주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김일호(가명) 석영텍스타일 대표가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직접 개발한 미라클 와플 자재와 이를 이용해 만든 나이키의 '나이키 어댑트 BB2.0' 농구화(왼쪽)를 보여주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개발한 자재까지 가져간 나이키

미라클 와플은 국내에서 약 60만 원에 팔리는 '나이키 어댑트 BB2.0' 농구화에 적용됐다. 미 프로농구(NBA)의 유명 선수들이 신고 경기를 뛰는 신발이다. 나이키는 과거에 NBA 경기 도중 선수가 신고 있던 농구화가 터져 망신을 당한 적이 있어 내구성을 특히 신경 쓴다. "나이키가 처음에 중국 등 다른 업체에 개발을 시켰는데 실패해서 우리에게 개발을 부탁했어요."

그런데 미라클 와플 때문에 석영은 나이키와 올해 2월 거래가 끊겼다. "미라클 와플로 나이키 농구화를 만드는 대만의 펭타이라는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생산업체와 많이 다퉜어요. 펭타이가 소개한 미라클 와플용 원단업체의 원단이 손으로 당겨도 찢어졌어요. 도저히 외피를 만들 수 없어서 나이키 본사에 보고했더니 펭타이에서 왜 문제를 만드냐며 화를 냈죠."

여기에 펭타이, 파우첸 등 대만 OEM 업체들을 대신하는 국내 거래대행사들과 마찰도 있었다. 국내 4개 거래대행사들은 국내 중소벤처 협력업체들로부터 자재를 납품받아 대만 생산업체들에게 전달하고 대만업체들이 준 대금을 국내 중소벤처협력업체에게 전해준다. 이 과정에서 거래대행사들이 단가 할인, 즉 가격 후려치기를 한다. "총 5% 할인을 요구해 할 수 없이 해줬죠."

펭타이와 파우첸이 잘못해 발생한 손실도 나이키 지시로 석영이 대신 물어줬다. "나이키코리아에서 문제를 조사한 뒤 석영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어요. 그런데도 나이키 본사에서는 펭타이에게 자재 손실에 따른 17만5,000달러의 손해를 석영이 물어주라고 압력을 넣었죠. 파우첸이 자재 보관을 잘못해 발생한 손해도 나이키 지시로 우리가 떠안았어요."

김 대표는 억울한 마음에 나이키에 여러 번 단가 할인 문제를 제기했으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온 것은 시끄럽고 문제 많은 협력업체라는 꼬리표였다.

"나이키 블랙리스트에 올라...사실상 사형선고"

결국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미국 나이키 본사로부터 거래해지 통보를 받았고 지난 2월 거래가 끊겼다. 나이키로부터 거래해지 통보를 받으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나이키는 계약서를 쓰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자재 개발 지시, 납품 물량과 가격, 거래 여부까지 모든 것을 결정해요. 뒤에서 전권을 휘두르죠. 나이키가 거래해지를 결정하면 내부 시스템에 거래중지 업체로 등록돼요. 그러면 전 세계 모든 나이키 OEM 공장과 거래가 끊어져요. 심지어 나이키가 인수한 캔버스하고도 거래를 할 수 없어요. 사실상 사형선고죠."

김 대표는 나이키코리아 직원과 대화를 나눈 녹음 파일을 들려주며 "펭타이의 불만을 들은 나이키가 잡음을 없애려고 일방적으로 거래를 해지했다"고 주장했다. "녹음 속 주인공인 나이키코리아 직원 말대로 펭타이에서 나이키에 불만을 얘기해 거래가 끊어진 거예요. 이 과정에서 나이키 본사는 사실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갈등이 발생하면 양쪽 모두 불러서 조사하고 결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일방 처리했죠."

이후 나이키는 황당한 요구를 했다. 거래가 끊겨도 기존에 납품하기로 한 테니스화 자재 등을 차질 없이 납품하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석영은 나이키와 거래 중지가 소문나며 재료 납품이나 지원 업무를 하던 더 작은 규모의 협력업체들과 외상거래, 즉 신용거래가 불가능해졌다. "나이키에 현금을 주던가 아니면 지불보증각서라도 써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도 거절했어요. 손발 다 잘라놓고 어떻게 자재를 만들어 납품하라는 겁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 김 대표와 나이키코리아 직원이 대화한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나이키코리아 직원은 만약 석영이 납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손실이 발생하면 소송을 하겠다고 한다. "나이키가 신발을 판매점에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약 400억 원의 손해배상을 판매점들에게 해줘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석영에게 소송을 하겠다는 거죠. 나이키는 계약서를 쓰지 않아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면서 어떻게 소송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이죠."

김일호(가명) 석영텍스타일 대표가 단가 후려치기, 비용 전가, 일방적 계약해지 등 나이키가 16년 동안 벌인 각종 갑질을 폭로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김일호(가명) 석영텍스타일 대표가 단가 후려치기, 비용 전가, 일방적 계약해지 등 나이키가 16년 동안 벌인 각종 갑질을 폭로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나이키, "언론에 알리지 마라"고 요구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나이키는 석영에 언론 접촉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나이키는 노사 문제가 발생해도 관계 당국보다 먼저 보고하라고 요구해요.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언론사 만나지 말고 나이키와 먼저 협의하라고 합니다."

1993년 창업해 오랜 세월 나이키에 수백 가지 자재를 납품하며 지난해 90억 원 매출을 올린 석영과 김 대표는 하루아침에 고사 위기에 내몰렸다. 나이키 납품을 위해 준비한 재고와 각종 원자재들은 창고 가득 쌓인 채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나이키 납품에 특화된 수십억 원대 기계설비도 작동을 멈췄다. 한때 협력업체 포함 100명이 넘어가던 직원들도 일터를 떠났다. "이미 직원 30명을 해고했어요. 매달 7,000만 원씩 적자를 보는 상황에서 정부가 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특별지원금으로 남은 직원들에게 임금을 주고 있는데 이마저도 8월에 끊겨요. 그러면 문 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 대표의 눈자위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브랜드에 납품하려고 해도 거기 맞는 자재를 개발해 공급하려면 2년 걸려요. 업계 관행이라는 이유로 나이키와 대만 OEM 업체, 국내 거래대행사들 요구대로 계약서 한 장 안 쓰고 거래한 것이 너무 속상해요. 감히 계약서 쓰자는 말조차 못했죠."

지난 6일 부산 공정거래위원회에 나이키의 글로벌 갑질을 신고한 김 대표는 이번 사태가 석영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국내 많은 중소벤처협력사들이 나이키에게 똑같이 당하고 있어요. 국내 신발 관련 수출액의 30%가 대만 펭타이, 파우첸 거래에서 나와요. 즉 나이키에서 나온다는 얘기죠. 우리가 공정위에 신고하지 않으면 나이키는 계속 이런 식으로 국내 중소협력업체들의 고혈을 빨 겁니다."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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