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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들에 의한 깜깜이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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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변호사보다 중요한 사람은 증인이다. 변호사가 아무리 화려한 변론을 펼친다 하더라도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의 증언이 재판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재판은 사실관계를 밝히고 밝혀진 사실관계에 법리를 적용해 법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다. 재판에서 법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 즉, 팩트(facts)다. 팩트가 틀리면 제 아무리 똑똑한 판사라 한들 오판을 면치 못한다.
사실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증인, 문서, 물건 등 각종 자료를 우리는 증거라 하고 이를 드러내는 과정을 증거조사라고 한다. 형사재판이건 민사재판이건 관련 증거를 법정에 빠짐없이 현출시키고 증거능력과 신빙성을 따지는 증거조사의 과정은 재판에서 제일 중요하다. 핵심 증거가 제대로 법정에 현출되지 못한 채 진행되는 재판, 위증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은 아무리 훌륭한 판사가 주관하더라도 깜깜이 재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재판의 전체 비중을 100이라 하면 그중에서 70 정도는 증거조사가 차지해야 한다. 재판장은 진실규명에 필요한 증거들이 법정에 제출되도록 당사자들을 압박해야 하고, 마땅히 현출되었어야 할 증거의 누락도 살펴야 하며, 증거를 오염시키는 행동을 응징해야 하고, 증거의 자격과 신빙성을 신중하게 검증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진실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정의는 물 흐르듯 실현된다. 재판의 나머지 30 정도가 현출된 증거를 통해서 사실 판단을 하고 여기에 법리를 적용하여 판단을 내린 후 이를 판결문에 담는 과정에 할애되어야 한다.
영미의 경우에는 증거조사(discovery) 과정에 있어 재판부의 권위는 막강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물론 재판부마다 다르고 또 제도적 한계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 법원은 증거가 충분히 현출되도록 하는 역할에 대체로 소극적이며 당사자들의 반칙, 태만, 거짓말을 응징하는 데 무기력하다.
2017년 11월 성폭행 혐의로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소위 ‘곡성 성폭행사건’의 피고인 김씨는 2019년 1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씨를 가해자로 지목했던 피해자가 자신의 진술이 고모의 회유에 의한 것이고 성폭행한 진범은 고모부라는 사실을 항소심에서 증언했기 때문이다(‘피해자 얼굴도 모른 11개월 옥살이, 곡성 성폭행 사건의 전말’, 본보 5일자 10면).
물론 피해자 고모의 거짓 고소와 위증 회유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피해자의 고모가 불과 1년 전에 똑같은 방식의 무고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모텔 CCTV와 카드결제내역 등 유무죄를 가릴만한 물적 증거가 수사과정에서 확보되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1심에서 증거조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기계적인 판단이 내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진실을 밝히려는 김씨 가족의 피눈물 나는 노력, 그리고 피해자의 뒤늦은 진술 번복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김씨의 억울한 옥살이 기간은 11개월이 아니라 6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판사들은 우리 사회에서 제일 똑똑한 수재들이다. 수재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겸손이고 판사의 겸손은 자신의 생각보다는 증거에 집중하는 노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재판은 수재들에 의한 깜깜이 재판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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