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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가 진정한 애국자? 당사자들은 시큰둥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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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수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일본 사회, 남다른 마니아 문화의 성지
‘오타쿠’라는 일본어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마니아를 뜻한다. 마니아(mania)라는 단어만 해도 보통 수준을 넘어선 열정, 광기라는 뜻이 있지만, 오타쿠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전문가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정보 수집력과 식견을 자랑하는 광적인 마니아를 말한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작화 감독이 몇 화부터는 바뀌었다는 등의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고, RPG 게임 속 ‘이스터 에그’(개발자가 게임 속에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를 찾아내는 등 보통의 소비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수준의 정보를 숙지하고 있다. 방대한 지식과 실천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팬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전 세계의 많은 팬이 즐기는 ‘코스프레’ (코스튬 플레이의 일본식 약어)도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을 현실 세계에서 재현하는 오타쿠의 놀이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오타쿠(한자로는 ‘お宅’인데 オタク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는 친하지 않은 상대를 가볍게 부르는 호칭으로, 한국어로 직역하면 ‘댁’ ‘그쪽’ 정도의 뉘앙스다. 일상적으로 자주 쓸 일이 없는 이 호칭이 마니아의 정체성이 된 경위를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SF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속 등장인물이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속설도 있고, 한 대중 문화 평론가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의 풍조를 이 호칭에 빗대면서 정체성으로 진화했다는 정설도 있다. 경위야 어떻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광적인 팬 문화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영어권에서도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골수 팬을 ‘otaku’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특정 분야에 대한 열정적인 팬을 ‘오덕’ ‘덕후’, 이들의 남다른 실천을 ‘덕질’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오타쿠라는 단어를 위트 있게 변형한 것이다.
◇늘어나는 젊은 오타쿠, 다양해지는 취향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오타쿠는 매우 친숙한 개념이다.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 “자기가 오타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수강생 중 절반 이상이 번쩍 손을 들었다. 앳된 대학 초년생들이 남다른 취미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정의하는 당돌함도 인상적이었지만, 공적인 장소인 강의실에서 오타쿠라는 사적 정체성을 당당하게 밝히는 젊은이가 많다는 점도 의외였다. 스마트폰에서 유튜브까지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와 늘 함께하는 대중문화 전성기인 만큼, 콘텐츠에 몰두하는 마니아 층이 두꺼워지는 것이 놀랍지는 않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많은 오타쿠가 인터넷 게시판 등 정체를 숨길 수 있는 공간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기를 즐겼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오타쿠 정체성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최근의 일이다.
1990년대까지 오타쿠는 공영 방송(NHK)에서 쓰기를 꺼리는 용어였다. 그 정도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오타쿠라고 하면 으레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유아기적 취향을 버리지 못한 미성숙한 남성, 만화책과 비디오 테이프가 산더미처럼 쌓인 방구석에서 나올 줄 모르는 비사교적인 사람을 떠올렸다. ‘오타쿠의 성지’라고 불리는 아키하바라 (오타쿠 관련 제품을 파는 상점과 서비스가 모여 있는 도쿄의 번화가)는 통통한 체형에 기름진 머리카락, 체크 무늬 셔츠를 청바지 속으로 넣어 입은 청년들-즉, 성적 매력이 전무한 ‘루저’들이 배회하는 장소로 묘사되곤 했다. 매스미디어도 부정적인 인식을 거들었다. 엽기적인 범죄의 피의자는 ‘오타쿠적’인 성향이 있다는 식의 취재와 보도가 빈번했다. 사정이 이러니 귀찮은 선입견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타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훨씬 편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오타쿠 하면 십중팔구 남성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여성이 오타쿠에 합류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몰두하는 정통파 오타쿠뿐 아니라, ‘아이돌 오타쿠’ ‘케이팝 오타쿠’ ‘패션 오타쿠’ 등 내용도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다양하다. 요즘 대학생의 60%가 “자신에게 오타쿠적인 기질이 있다”고 인식하며, 여고생의 80%가 “오타쿠라는 단어에 호감을 갖는다”고 답한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젊은 오타쿠가 많아지고 ‘팬질’의 내용이 다양해진 만큼, 음침하고 폐쇄적이라는 사회적 편견도 많이 옅어졌다. 오타쿠를 자처하는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나만의 취향에 몰두하고 싶다는 고집스러운 욕망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획일적인 조직 생활, 주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완고한 질서 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사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오직 나만의 관심사를 마음껏 추구해 보는 것이야말로 오타쿠의 본질인 것이다.
◇대중문화는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힘, 국가 권력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편, 일본 정부가 10여 년 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쿨 재팬’ 프로젝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오타쿠 문화와 함께 커 온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은 일찌감치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등 할리우드의 거물들이 자신은 오타쿠라고 공언하는 등 대중문화 장르에서 만만치않은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쿨 재팬’ 프로젝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본의 국가 브랜드를 강화하겠다는 국제 홍보 전략이었다. 해외 관광객 유치로 경제 부흥을 꾀한 ‘아베노믹스’의 중요한 축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전에는 줄곧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온 오타쿠 문화를 돌연 세계에 자랑하고픈 일본 문화의 대표 격으로 지명한 것이다. 덩달아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예전에는 ‘반사회적인 괴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에 급급했던 매스미디어의 논조가 돌변해서, 오타쿠야말로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문화적 리더이며 자국 문화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애국자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의 변화에 대해 정작 당사자들은 시큰둥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취향, 개인적인 열정으로 키워온 팬덤이 갑작스럽게 국가 프로젝트로 돌변한 상황이 반갑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의 ‘쿨 재팬’ 프로젝트는 쓸데없이 세금만 낭비한 실패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대중 문화 콘텐츠를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거대한 조직이 생겼을 뿐,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중문화는 표현의 무한한 자유가 보장될 때에 비로소 독창성이 발휘되는 영역이다. 이런 분야에 국가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했다고 생각한다.
1980, 90년대에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던 것처럼, 지금은 한국의 대중음악이나 영화가 해외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다만, 이런 현상에 편승하는 소위 ‘국뽕’ 담론은 우려스럽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한 사회적 평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팬들의 열정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권력의 관심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팬덤을 꽃피울 수 있었다. 어떨 때에는 국가가 나서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와주는 것이다. 대중문화처럼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영역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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