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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분노는 능력이 아니다

입력
2021.07.05 04:30
수정
2021.07.05 09:2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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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 호프 자런은 산문집 '랩걸'에서 씨앗이 초록으로 우거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기다린 끝에 (…)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몸을 펼치고 원래 되려고 했던 존재가 마침내 될 수 있다."

식물이 그렇다는 얘기다. 기다림과 우연의 조합은 인간의 성취를 보장하지 않는다. 꿈은 대개 준비와 실력으로 실현된다. 꿈이 클수록 준비는 철저하고 실력은 탁월해야 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준비된, 실력 있는 대통령 후보인가. 대선 출마선언문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한 땀 한 땀 직접 썼다는 출마선언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제가 많이 분노했습니다. 분노한 국민 여러분, 함께 더 많이 분노합시다. 그래서 정권을 바꿉시다." 현 정권을 향한 분노로써 "분노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검사는 분노해야 성취한다. 세상을 착하게만 보는 태평한 검사는 출중해질 수 없다. 검찰총장까지 오른 '검사 윤석열'도 분노에 재능이 있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분노를 높이 샀다. 박근혜, 조국을 쳤듯 불공정, 내로남불을 도려내라는 염원이 그를 거물로 키웠다.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존재가 마침내 되려면, 그러나 분노만으론 안 된다.

분노는 쉽다. 에너지는 쓰이지만 노력은 필요 없다. 높은 한 사람을 향한 공동의 분노는 집단의 볼품없음을 가리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공적이었던 과장이 떠나면 당장은 후련하지만, 승진한 새 과장이 구세주로 판명 나는 일은 현실엔 별로 없다. 구체성과 목표를 결여한 분노는 이내 시든다. "이 회사, X 같아." 매일 욕하는 게 전부라면, 매일 입만 더러워진다.

문재인 정권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정치하러 나왔다고 윤 전 총장은 호령했다. '속 편히 두고 볼 수 있는 윤석열 정권'을 어떻게 만들 건지 몹시 궁금하지만, 일주일째 소식이 없다. 출마선언문에서 언급도 하지 않은 '노동' '안전' '복지' '의료' '문화' '환경'은 어쩔 건지도 감감하다.

윤 전 총장은 4일 분노에 찬 메시지 두 건을 냈다. 처가를 흠잡은 언론보도를 향한 분노, 이재명 경기지사의 역사관을 조준한 분노. 자신감인지, 천성인지 모르겠지만, '대선주자 윤석열'은 분노하는 일 말고는 시적시적하다.

검사 시절 딴생각 품었던 걸 감추려고 연기하는 쪽이든, 대권을 요행히 거머쥘 수 있다고 기대하는 쪽이든, 유권자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대선의 예측 불가능성이 커질수록 정확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투표할 기회를 가리기 때문이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과오가 켜켜이 쌓여 부글부글 끓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짜장면에서 오이 걷어내듯 '문재인'이란 이름만 지운다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될 리 없다. 윤 전 총장의 페이스북은 미숙함 탓에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지만, 대한민국은 그럴 수 없다.

정권교체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행복과 풍요로 우거진 미래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정권을 응징하는 투표로 탄생한 새 정권이 금세 교체 대상이 된 사례는 충분히 쌓였다. 어떤 다른 정권을 세울 건지, 넘치도록 설명할 책임이 '대선주자 윤석열'에게 있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 힘내십시오." 윤 전 총장이 출마선언문을 맺은 문장이다. 당장 힘을 내야 할 것은, 그 누구보다 본인이지 싶다.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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