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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식 짐짝 같다"던 남편, 황혼이혼만이 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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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25년 전 결혼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50대 주부입니다. 결혼 생활 내내 저와 아이들을 무시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남편 때문에 괴롭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하고 나니 이런 남편과 둘만 사는 게 더 힘들게 느껴져요.
남편은 결혼 초부터 오직 자기밖에 몰랐어요. 유학생이었던 남편은 결혼하고도 한동안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남편은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육아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오후 1시까지 자다가 느지막한 오후에 학교에 가서 매번 새벽에 들어오는 게 남편의 일과였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 보니 경제적으로 쪼들렸고, 저는 독박육아에 파트타임 근무를 하며 30대를 보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역할도 전혀 하지 못했어요. 아이들 생일도 잊고, 방학을 했는지도 모르는 무심한 아빠였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처와 자식이 인생의 짐짝같이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가족이 함께한 행복한 추억이 거의 없어요. 아이들도 이런 아빠에 대한 상처가 많습니다. 얼마 전 아이들이 "아빠가 우리에게 했던 지난 일들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외롭게 죽어가길 바란다"고 해서 정말 놀랐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의 이런 생각을 넌지시 전하면 "밥 먹여 주고 재워 줬으면 아빠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큰소리칩니다.
남편은 공부를 마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전문직으로 일합니다. 그런데 어째 남편의 이해 못할 행동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장을 본 영수증을 일일이 확인하며, 돈을 얼마나 썼는지 감시합니다. 저에게 말 없이 통장에서 생활비를 빼 버리기도 해요. 잔고가 부족해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유를 물으면 '내 돈 내가 쓰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네요.
저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남편의 지속적인 무시입니다. 남편은 한집에 있으면서도 늘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며 저를 투명인간 취급해요. 유튜브 중독인지 방에서 온종일 컴퓨터만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일에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하고 감정이 격해지면 폭력을 행사해요. 화를 내는 이유도 '라면 물을 못 맞췄다' 같은 사소한 일입니다. 이럴 때마다 제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아 너무 비참합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언젠가는 남편의 직장 동료가 남편에게 "○○씨는 자신이 늘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남편 가족은 모여 있다가도 아버지만 집에 오면 모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유학 비용을 지원받을 때도 대판 싸우고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인색하고 고집스럽고 불편하게 한다고요. 시아버지는 자신이 먹고 싶은 '갈비탕'이 아니라, 외국에서 온 손주들이 원하는 '갈비구이'를 시켰다고 언짢아하는 분이세요. 시어머니는 남편이 어릴 때 심부름을 잘 못해서 시키지도 않았고, 그저 공부만 하고 또 잘해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하세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고 20년 넘게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의 성품만 좀 너그러우면 좋으련만 무시와 욕설, 폭력에 언제까지 참고 살아야 하나 슬픕니다. 이혼을 하자니 참고 산 시간이 아깝고 또 제가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아 경제력도 없고요. 갱년기로 몸도 아픈데 정서적으로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이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 결혼이 아직 객관화가 안 됐는지, 정말 황혼이혼만이 답인가 아직도 의문이 남아요.
김정희(가명·53·주부)
정희씨, 서로 아무리 좋아해서 시작했어도 참 어려운 게 결혼 생활이지요. 부부 문제는 각자 입장이 있고, 서로에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앙금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부부 사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정희씨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금 괴로운 것은 이혼을 하자니 그동안 참고 산 게 너무 억울하고, 이혼을 안 하자니 인간으로서 모멸감이 들기 때문으로 보여요. 막상 이혼을 해도 혼자 살아가는 일이 걱정도 되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3자가 어떻게 이혼을 하라, 말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혼을 결단하는 건 정희씨 본인이라면, 정희씨가 이 결혼 생활을 유지했을 때 지금보다 덜 괴로울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인 것 같아요. 당신이 감정적으로 더 이상 피폐해지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칼럼을 씁니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사연을 써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희씨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정희씨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정희씨 남편은 사회성 발달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남편은 가까운 누구와도 잘 지내지 못합니다. 아내, 자식, 동료 누구에게도 마음을, 생각을, 시간을, 돈을 내어 주지 않아요. 정희씨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은 사람이 아닌 미디어, 유튜브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같은 단순한 궁금증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아닌 유튜브를 보면서 해소하고 있어요.
사회성은 무엇일까요. 나 아닌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는 능력입니다. 타인과 가까워지고, 친밀함을 유지하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풀어갈 수 있는 역량이죠. 책에 나온 정보를 습득하는 인지 능력과는 다릅니다. 남편처럼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회성이 꼭 잘 발달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런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할거예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좀 다릅니다. 남편은 이기적인 게 아닌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에요.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피해를 입히는 일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다기보다는 타인의 마음과 입장에 대한 공감이 안 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희씨에게 막말을 하는 것도 이 말을 했을 때 상대방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까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남편은 그럼 왜 사회성 발달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 즉 사회성이 발달하려면 어떻게 성장해야 할까요. 사회성이 발달하려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반가웠던 경험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려면 어때야 할까요. 어렸을 때 처음 인간 관계를 맺는 타인, 바로 '부모'를 만나면 반갑고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늘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최고의 유산은 남과 잘 지내는 능력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유년 시절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것 같아요. 남편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생긴 이런 결핍을 안고 그대로 성인이 됐어요. 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천적인 노력으로 사회성이 좋아질 수 있지만 남편은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한 채 커서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만나도 반갑지 않고, 아내와 대화하는 것도 달갑지 않아요.
사회성이 잘 발달되지 않은 사람의 내면은 불안하고 예민할 가능성이 큽니다. 인간관계는 미묘하거든요. 인간이 주는 다양한 상황과 목소리, 눈빛, 표정을 편안하게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방이 준 자극을 오해하기도 하고 과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지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상황들을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을 하지요. 그러다 누군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건드리면,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감정을 건드린 상대 탓을 하지요.
정희씨 잘못이 아닌데도 남편이 갑자기 소리 지르고 화를 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국이 미지근하다'거나 '집에 먼지가 많다' 같은 사소한 일이라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하면 '네가 나를 불편하게 했으니 네가 나쁜 놈이야'라고 화를 내는 거죠. 남편은 서로 노력하고 이해해서 간격을 좁혀 나가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자기가 원하는 상태를 유지해야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굉장히 완고해지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유연해지는 사람이 있고, 더 고집스러워지는 사람이 있는데 남편은 후자인 것으로 보여요.
정희씨 자녀들도 이런 아빠와의 관계에서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아요. 부모가 자기를 조건 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고 진심 어리게 보살펴 주기를 원하는 자식들의 바람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게 충족되지 못하면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는 분노감, '내가 오죽 못났으면 이런 사랑도 못 받나'하는 좌절감이 생깁니다. 성인이 됐더라도 정희씨가 자녀들과 소통하면서 이런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필요해 보여요. 아이들을 아버지와 성급하게 화해시키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고, 아이들이 아빠와의 관계를 자주 이야기하도록 하고, 정희씨가 이를 공감해주면 좋겠습니다.
정희씨가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면, 남편의 이런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무조건 이해하고 참고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어야 남편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덜 피폐해질 거예요.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존재여서 남편이 나에게 이런다'가 아니라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희씨가 아닌 누구도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려울 거예요.
남편과 더 이상 같이 살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이혼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때까지 결혼 생활을 하며 노력한 게 너무 허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이 남아 있어서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제3자가 정희씨 결정을 어떻게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 자신이 있어야 결혼 생활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 결혼 생활이 도저히 당신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없다고 생각이 들 때는, 결혼 생활을 끝내는 것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경제적인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요. 남편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50대 남성입니다. 남편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는 당신 마음의 건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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