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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이 가스라이팅을 웃음 소재로... 도 넘은 지상파 예능

입력
2021.07.05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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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적·성역할 편견 자막 그대로?
15세 이상 청소년에 무방비로 노출?
방심위 6개월 '개점 휴업'에? 긴 심의 공백

지난달 방송된 '1박2일'에서 '틈새 먹스라이팅'이란 자막이 쓰였다. '먹다'와 심리적 학대를 뜻하는 '가스라이팅'을 무분별하게 합성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KBS 방송 캡처

지난달 방송된 '1박2일'에서 '틈새 먹스라이팅'이란 자막이 쓰였다. '먹다'와 심리적 학대를 뜻하는 '가스라이팅'을 무분별하게 합성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KBS 방송 캡처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웃음을 핑계로 학대적 표현과 성 역할 편견을 부추기는 자막을 쏟아내 논란을 빚고 있다. 유튜브 개인 방송을 방불케 할 정도의 '도'를 넘은 자막이 15세 이상 청소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더욱이 이를 감시하고 제재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6개월째 '개점 휴업' 상태여서 우려를 더한다. 올 1월 방심위 4기 위원들의 임기가 끝난 후 여야의 힘겨루기로 5기 위원에 대한 임명이 늦어지면서 지상파 방송 심의는 아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TV에서 무분별한 자막이 더 쏟아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가스라이팅'이 웃음 소재로 쓰일 수 있나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지상파 주말 예능이 '혐오 무검열 지대'로 전락했다.

지난달 6일 KBS2 '1박2일'에선 식사 복불복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먹스라이팅'이란 자막이 큼지막하게 떴다. 먹스라이팅은 '먹다'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뜻의 '가스라이팅'의 합성어.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 위력으로 통제해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주로 등장한다. 정서적 학대를 뜻하는 이 '위험한' 단어가 웃음의 소재로 쓰일 수 있을까.

'1박2일' 시청자 게시판엔 '가스라이팅이 웃음거리로 소비될 단어냐'(정은*) '이 단어가 그냥 재미로 사용되는 게 불쾌하다'(문소*) 등의 항의글이 올라왔다. 가스라이팅을 예능에서 희화화하는 것은 그로 인한 폭력성을 사소화시키고, 2차 가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가스라이팅은 '1박2일'에서 '진정한 먹스라이팅' 등의 방식으로 5~6월 두 달에 걸쳐 최소 세 번 이상 나갔다.

예능프로그램 '쓰리박'에서 '남자는 드라이브'란 자막이 쓰였다. 어떤 골프채를 쓰느냐에 따라 성별이 나뉜다는 편견을 부추기는 자막이란 지적이다. MBC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쓰리박'에서 '남자는 드라이브'란 자막이 쓰였다. 어떤 골프채를 쓰느냐에 따라 성별이 나뉜다는 편견을 부추기는 자막이란 지적이다. MBC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그룹 샤이니 멤버 키는 '키이모'로 불린다. 요리 등 집안일에 능숙하고 다정다감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MBC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그룹 샤이니 멤버 키는 '키이모'로 불린다. 요리 등 집안일에 능숙하고 다정다감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MBC 방송 캡처


"남자는 드라이브?" 퇴보하는 성인지

지상파 예능 자막이 성고정 관념을 강화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등 한국을 빛낸 운동 스타들이 출연한 MBC '쓰리박'에선 한 출연자가 "남자는 드라이브죠"라고 하는 말을 자막으로 강조하고, '나 혼자 산다'에선 아이돌그룹 샤이니 멤버 키를 청소와 요리를 잘하고 다정다감하다는 이유 등으로 '키 이모'란 표현을 여러 차례 내보냈다. 집과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청년을 이모라고 명명, 남자라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방송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halmonee5*****)엔 이런 글이 급속도로 퍼졌다. '기범이를 이모라고 칭하는 게 싫다. 자신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가꿀 줄 알고, 직접 기른 식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변의 아끼는 사람에게 나눠줄 줄 아는 30대 남성이다. 남성이라면 저런 걸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드러나 불편하다. 세상엔 저런 남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에서 황선홍은 '개감독'으로 호명됐다. 방송에서 개그우먼들이 모인 '개벤저스'(개그우먼+어벤저스)팀 감독을 맡고 있는데, 잠깐 벌칙 상황을 놓친 장면에서 졸지에 '개감독'으로 희화화됐다. SBS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에서 황선홍은 '개감독'으로 호명됐다. 방송에서 개그우먼들이 모인 '개벤저스'(개그우먼+어벤저스)팀 감독을 맡고 있는데, 잠깐 벌칙 상황을 놓친 장면에서 졸지에 '개감독'으로 희화화됐다. SBS 방송 캡처


황선홍이 '개감독' 된 황당한 사연

지상파 예능 자막의 자극성도 짙어지고 있다. SBS '골 때리는 그녀'에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황선홍은 졸지에 '개감독'이 됐다. 지난달 23일 방송에서 황 전 감독의 얼굴 아래엔 '선수에게 한 수 배운 개감독'이란 자막이 깔렸다. 황 전 감독이 골키퍼가 골라인 밖에서 공을 잡아 반칙을 받는 맥락을 놓친 뒤 주위에 있던 선수가 그 상황을 알려주고 난 뒤 붙은 자막이었다. 황 전 감독은 이 방송에서 개그우먼들로 구성된 '개벤저스'(개그우먼+어벤저스)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개벤저스' 감독을 '개감독'으로 뚝 잘라 조롱하는 뉘앙스를 강화한 것이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유튜브 콘텐츠의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자막을 지상파 예능 제작진이 유행처럼 좇고 있기 때문"이라며 "힙합 프로그램에서 래퍼가 랩이 엉킬 때 하는 '가사를 전다' 등의 표현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비하 표현으로 들릴 수 있고, 지상파라면 이를 걸러줘야 하는데 이런 기능이 전혀 작동이 안 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본보가 지상파 3사 예능 심의 위반 추이를 조사한 결과, 2020년 심의 위반으로 방심위에서 경고 등 제재를 받은 건수는 64건으로, 2017년 17건보다 3배 이상 많아졌다.


3년간 3배 많아진 위반... '공염불' 된 내부 심의

선정적인 자막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지만, 마땅한 규제 강화 방법이 없는 게 문제다.

방심위 관계자는 "방송 관련 시청자 민원이 1~6월 7,600건을 넘어섰다"며 "하지만 심의위 구성이 안 돼 심의 및 의결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난처해했다. 지상파에서 선정적 자막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제작진 외 외부인을 포함한 방송 전 모니터링이 강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석현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팀장은 "지상파 내부 심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라며 "글로 시각화되는 자막은 유포되기 쉬워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더 꼼꼼한 사전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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