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값 사수' 초대형 현수막에 도시가 묻혔다

입력
2021.07.08 04:30

서울·경기 지역 아파트 외벽과 단지 입구에 '결사' '사수' '피' 등 격렬한 표현을 담은 각양각색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고층 아파트 벽면을 절반 이상 덮는 초대형 현수막이 난립하면서 시각공해는 물론, 안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5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촬영한 사진을 이어 붙였다.



‘GTX-C 노선 은마 통과 결사반대 국토부는 왜 속였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외벽)

‘사유재산 침해하는 지구단위계획 철회하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외벽)

‘피 같은 돈 공중분해 밀실행정 통과기준 국토부는 응답하라’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11단지 아파트 외벽)

수도권 아파트 외벽이 총천연색 ‘현수막’으로 뒤덮였다. 가로, 세로 폭이 10m를 훌쩍 넘는 ‘초대형’ 사이즈에, 자극적 구호가 큼직하게 도배된 디자인으로 도시 미관을 해친다. 정부가 추진 중인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사업에 대한 비판부터 임대아파트 조성에 반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형 현수막까지 내용도 제각각이다.

결국 ‘집값 사수’라는 절실한 열망을 담고 있는 이 초대형 현수막들은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하지만 아파트 외벽이 입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전광판’처럼 사용되어 온 오랜 관행 탓에 단속은 쉽지 않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17동 외벽에 국토부를 규탄하는 현수박이 붙어 있다.

수도권 곳곳에 우후죽순 내걸린 현수막의 주요 화두는 GTX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민들은 단지 지하를 지나는 GTX-C 노선 건립을 반대하며 현수막을 내걸었다. 단지 밑으로 철도 노선이 뚫릴 경우 지반이 약화하고, 각종 소음과 진동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향후 재건축 사업에 차질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이루어진 일종의 ‘정치적 행동’으로도 해석된다.

GTX-C 노선 정차역 확정으로 수혜 가능성이 커진 청량리역 인근 주민들은 아파트 신축 현장 외벽에 ‘왕십리역 신설 반대 현수막’을 걸었다. 인근 왕십리역이 추가 신설 역으로 유력해지면서다. 주민들은 열차가 가까운 왕십리역에 정차하면 주행속도가 느려져 사업성이 떨어지고, 이익도 분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 아파트 신축 공사현장에 GTX-C의 왕십리역 정차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부착돼 있다.


지난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시아선수촌아파트 1동과 2동 외벽에 '지구단위계획 철회'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2018년 3월 예비안전진단을 통과한 이 단지는 올 3월부터 재건축 정밀안전진단 절차를 밟는 중이었으나, 최근 재건축 심의에서 보류되고 서울시의 임대주택 공급 계획이 발표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지역이기주의가 엿보이는 현수막도 눈에 띈다. 송파구 잠실동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주민들은 지난 4월 서울시가 발표한 ‘지구단위 계획’에 전면 반대하는 내용의 초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해당 계획에는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부지에 ‘노인, 신혼부부, 청년층을 위한 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이를 두고 주민들은 ‘사유재산 침해’라며 맞서고 있다.

지난달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11단지아파트 1107동과 1108동 외벽에 붙은 현수막들. 최근 재건축 2차 정밀안전진단에서 탈락하자 분노한 11단지 주민들이 아파트 외벽에 국토부와 구청장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11단지에는 ‘안전진단 탈락’을 부정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정밀안전진단에서 예상보다 높은 등급을 받아 재건축이 불가능해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국토부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제작한 것이다. “보기 흉하다’, “혐오스럽다”는 시민들의 민원이 다수 접수되자 양천구청 측이 철거를 유도하는 계고장을 보냈지만, 철거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11단지아파트 1109동에 붙은 현수막.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11단지아파트 1108동에 붙은 현수막.

인근을 지나다 보면 누구나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이 초대형 현수막들은 모두 불법이다. 아파트 외벽은 옥외광고물법상 현수막 설치가 허가된 지정 구역이 아니므로 과태료 부과대상이다. 특히 가로와 세로폭이 10m를 넘는 대형 현수막은 대개 500만 원 이상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단속 의무가 있는 지자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강제 철거에 나설 경우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는 데다가, 전문업체를 고용해야 하는 철거 비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대형 현수막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30만~40만 원이지만, 철거하는 데에는 제작비용의 다섯 배에 달하는 150만 원가량이 든다. 안전상의 문제로 ‘사다리차’와 같은 전문 장비를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김포시 풍무동 풍무센트럴푸르지오아파트에 GTX-D의 강남 직결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부착돼 있다.


아파트 외벽의 초대형 현수막은 요즘 같은 장마철이나 태풍이 잦은 계절에 특히 위험하다. 폭우로 무거워진 현수막이 강풍에 의해 파손될 경우 인근을 덮쳐 인명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감전 등 전기 안전사고도 일으킬 수 있다. 대개 장마나 태풍 예보가 나오면 지자체가 거리의 옥외광고물을 일괄 철거하는 게 보통이나, 비용ᆞ인력 한계로 아파트 단지 외벽까지 정비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달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남서울아파트에 재건축 사업시행인가 승인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불법 현수막을 대하는 지자체의 태도도 제각각 다르다. 강남구청은 “정치적 의도가 강하거나 시의성 있는 현수막은 구청 재량으로 정비하지 않는다”고 밝힌 데 반해, 동대문구청 관계자는 “정치적 내용을 담은 현수막이라고 해도, 행정안전부나 법제처에서 옥외광고물법은 정당법상 표현의 자유보다 우선해 따라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즉시 철거한다”고 밝혔다. 양천구청 측은 “작은 현수막은 되도록 강제 철거하고, 대형 현수막의 경우 계고장을 보내 2주 안에 자진 철거하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실제로 미치는 행정력의 강도가 주민들의 민원이나 항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현실은 어느 지자체든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박지윤 기자
이누리 인턴기자
서동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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