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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도 '예쁜 외모' 따져...비닐 입혀 키우는 애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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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사지 않을 권리]<14>인큐 비닐 애호박
기후위기와 쓰레기산에 신음하면서도 왜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덩어리를 생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요. '제로웨이스트 실험실'은 그동안 주로 소비자들에게 전가해온 재활용 문제를 생산자 및 정부의 책임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의 우려 속에서 그래도 플라스틱을 쓸 수 밖에 없다면, 그 이유가 설득력 있고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농산물의 외모를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막대한 플라스틱을 쓴다면 어떤가.
시중에 유통되는 애호박이 그렇다. 소비자들은 마트 등에서 유독 꽉 낀 비닐(플라스틱 필름)로 낱개 포장된 애호박을 보았을 것이다. "왜 이렇게 단단히 포장했지?"라고 의아할 수 있지만, 이는 키울 때부터 외모를 일률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씌운 '성형 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인 한 명이 1년간 쓰는 비닐봉투는 약 9.2㎏. 그린피스에 따르면 그렇다.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비닐 없는 장보기’를 시도하고, 마트에서 나눠 주는 비닐로 포장하는 대신, 다회용 장바구니나 천에 채소를 담는다.
하지만 애호박 포장은 이런 소비자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한다. 대형마트는 물론 웬만한 전통시장도 비닐 없는 애호박을 찾기 쉽지 않다. 비닐이 워낙 단단하게 붙어있다 보니 ‘비닐 빼고 주세요’ 라고 부탁하기도 애매하다.
비닐을 씌워 키운 애호박은 2004년 이전엔 없었다.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은 애호박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배경에 농산물에조차 '외모'를 요구하는 왜곡된 유통구조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애호박에 씌운 비닐은 포장인 동시에 ‘성형 틀’이다. 정식 명칭은 ‘인큐 비닐’. 아기를 넣어 키우는 인큐베이터처럼, 꽃이 갓 떨어진 어린 애호박에 비닐을 씌워 곧은 모양으로 자라게 한다.
애호박 성형은 21세기 초반에 시작됐다. 처음은 2000년 등장한 ‘태극 애호박’. 단단한 플라스틱 통에 어린 애호박을 넣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모양으로 재배해서 판매했다. 그러다 2004년 인큐 비닐이 개발됐다. 곧은 모양을 만들면서 벗겨낼 필요 없이 포장 역할을 하는 비닐 틀은 널리 퍼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평균 호박 생산량은 약 20만 톤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호박 생산량의 90%가 애호박이니 매년 18만 톤의 애호박이 수확되는 것이다. 애호박 한 개가 300g이라고 치면 매년 약 6억 개가 재배됐다.
인큐 애호박이 등장한 시점으로 계산하면 16년간 약 96억 개가 생산된 것이다. 비닐을 안 씌운 애호박이 통계에 포함된 걸 감안하더라도 매년 수억 개의 비닐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 비닐은 대부분 복합 플라스틱인 아더(other) 재질이다. 물질 재활용은 사실상 불가능해 대부분 소각ㆍ매립됐을 가능성이 높다.
농민들에게 인큐 애호박 재배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비닐을 안 씌우면 판로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들이 인큐 애호박만 찾는다. 단체급식 등 대량 주문을 할 때도 인큐 호박이 선호된다.
경기 평택의 한 농민은 “학교 급식에도 비닐 없는 애호박은 공급이 어렵다”며 “비닐 씌운 게 크기가 일정하다 보니 요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라고 말했다. 때문에 비닐 없는 애호박은 지역 시장이나 농협에 처음 출하할 때부터 찬밥 신세다.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들은 아예 “인큐 애호박만 판매한다”는 방침이다. 롯데마트는 “비닐이 없는 애호박도 취급해왔다”고 답변했지만 실제 매장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대형마트가 말하는 이유는 ‘신선도’다. 이마트 관계자는 “비닐이 없는 애호박은 유통 과정이나 고객이 구매하는 과정에서 흠집이나 짓무름 같은 상처가 쉽게 발생한다”며 “오이 등 다른 채소보다 껍질이 더 연해서 (비닐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다른 두 곳도 비슷한 답변을 내놨다.
유통 측면에서 인큐 애호박의 장점은 농민들도 일부 인정한다. 홍성로컬푸드 협동조합 관계자는 “비닐을 씌우면 상처도 덜 나고 겉이 마르지 않아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이라면 표면이 연한 과일이나 채소는 모두 비닐을 씌워서 키워야 한다. 비닐을 씌워 키운 애호박이 일부 장점이 있더라도, 쓰레기 문제 등 공익의 관점에서 볼 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맛과 영양 등 종합적인 신선도를 따져도 비닐 없는 애호박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똑같은 밭에서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영양에는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맛은 자연 그대로 키운 쪽이 더 낫다는 것. 강원도 화천의 애호박농가연합인 병풍산 작목반의 박상준 총무는 “애호박에 비닐을 씌우면 온실 역할도 해서 좀 더 빨리 자라는데, 이런 속성으로 키운 애호박보다는 그냥 호박이 더 단단하고 맛이 좋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인큐 애호박 재배가 지속되는 건 상품성과 관리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대형마트의 유통방식 탓이 크다. ‘못난이 농산물’ 전문 유통업체인 프레시어글리의 박성호 대표는 “마트에서는 소비자가 직접 상품을 고르기 때문에 균일가를 맞추려 특정 규격의 채소만 선호한다”고 말했다.
농산물 유통구조가 겉모습 위주로 경도되지만 않았어도 인큐 애호박 같은 발명품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에는 오이 등 다른 채소에도 플라스틱 캡을 씌워 성형하고 브랜드 로고까지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농산물에 공산품과 같은 규격을 바라는 웃지 못할 기준이 야기한 결과다.
박성호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는 품질에 이상이 없어도 생김새가 울퉁불퉁하거나, 심지어 규격보다 작거나 큰 것까지 ‘B급’으로 취급된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단지 불필요한 플라스틱을 더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호박과 달리 성형이 어려운 농산물의 경우 생김새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등급 외’라는 딱지가 붙는데, 이로 인해 버려지는 양이 상당하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가 128개 산지농협을 조사한 결과 수확량의 평균 11.8%가 등급 외였다. 이는 농협 선별과정에서 나온 양으로, 농민이 아예 산지에서 폐기하는 것까지 따지면 실제로 버려지는 양은 더욱 많을 것이다.
이렇게 버려지는 농산물은 비닐 포장만큼이나 기후위기에 악영향을 끼친다. 농산물이 매립되어 썩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인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 효과가 약 21배 강력하다. 또한 농산물이 썩으며 나오는 폐수는 주변 토양도 오염시킨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및 환경단체들은 식량폐기물을 줄이는 것이 기후위기를 막는 핵심 전략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19년 유엔식량농업기구(UNFA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먹지도 않고 버려지는 ‘못난이 농산물’ 양은 1년에 약 13억 톤에 이른다. 세계 식품생산량의 3분의 1이나 된다. 2050년까지 이런 식량폐기물 발생량을 절반으로 줄이면 약 26.2기가톤의 온실가스 배출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법은 단순하다. 유통사가 생김새보다 맛과 영양 같은 '본질'을 중시하면 된다. 병풍산 작목반의 박상준 총무는 “애호박에 일일이 인큐를 씌울 경우 비닐쓰레기도 많이 나오는 데다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품이 훨씬 많이 든다”며 “농민들을 위해서라도 일반 애호박을 많이 대우해주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애호박 농사 16년차인 올해 처음으로 인큐 비닐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간 자연 그대로의 농법을 고수해 왔지만, "판매하려면 어쩔수 없다"며 씁쓸히 웃었다.
그러나 농민과 소비자가 원하더라도, 자연성장 애호박을 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보가 취재한 대형 유통사들 중에서 "앞으로 비닐을 씌우지 않은 애호박을 팔겠다"고 답변한 업체는 거의 없었다. 홈플러스는 "저렴하게 들여올 수 있으면 고려해보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비닐을 안 씌운 자연성장 애호박은 이미 더 크고 저렴한데도 파는 곳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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