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10여 년 전에는 한국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따라야 한다더니 요즘엔 베네수엘라 꼴 날까봐 걱정들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영화 '미션'(1986). 밀림에 울리는 오보에 소리에 매료된 인디오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가브리엘 신부가 연주하는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 환상 속에서)는 벌거벗은 인디오들에게 옷을 입힌다. 가톨릭 사제가 된 노예 상인 멘도사는 인디오 보호 공동체에서 봉사로 속죄의 삶을 산다. 가브리엘 신부가 이끄는 공동체의 수익은 공평하게 분배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중남미대륙에 첫발을 디딘 후 정복자 유럽인, 원주민 인디오, 노예로 들어온 흑인의 생물학적·문화적 혼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강간당한 원주민 여인과 그녀의 아이들은 버려졌다. 아버지의 부재와 강한 어머니는 중남미의 상징이 되었다.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원주민 인디오들은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원주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식민지의 수익은 온전히 백인들의 몫이었다.
부귀영화를 좇아 유럽을 떠난 이들에게도 중남미는 아름답기만 한 신대륙이 아니었다. 정복지에서 태어난 후손(크리올)들은 서자 취급을 받았다. 불만을 품은 크리올들은 독립을 꾀했고 그들의 이전투구에서 인디오들은 부속물이 되었다. 백인들은 원주민 인디오들의 부족과 언어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대륙을 쪼개 국가를 건설했다.
혼혈의 혼혈. 순수 백인과 순수 인디오는 무의미했다. 그러나 크리올들은 본토보다 더 유럽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싶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인종적·문화적으로 정통 유럽 취급을 받지 못했다. 중남미 여러 나라가 진정한 백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정책적으로 북유럽 이민을 받아들였다. 사회·경제·군사를 모두 장악한 엘리트층이 과두지배를 고착화했고, 피부색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다.
19세기 중엽 독립 후 노예 제도는 사라졌으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여전하다. 어두운 피부색은 가난과 불평등의 대명사다. 중남미에서 ‘인종’의 정의는 ‘본인이 인정하는 인종’이다. 백인과의 혼혈이면 자신을 백인으로 정의하고 원주민 인디오의 성씨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일은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세계적 미인 대회를 휩쓰는 중남미의 미인들도, 텔레노벨라의 주연도, 주한 중남미 대사관의 외교관들도 거의 다 백인이다. 어두운 피부색은 조연일 뿐이다. 차베스 전 대통령(1999~2013)은 베네수엘라 최초의 아프로-인디오 출신, 모랄레스 전 대통령(2006-2019)은 볼리비아 최초의 인디오 출신 지도자였다. 애석하게도 두 사회주의자 주연의 드라마는 실패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이전부터 중남미 전역에서 정치적 긴장감과 사회적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2015~2019년 지역 성장은 평균 1%에 불과했다. ECLAC(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경제위원회)는 2020년 지역 빈곤은 전년도보다 3.2% 늘어난 33.7%로 지역 경제가 12년 후퇴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의 30%가 중남미에 몰려있다. 역병이 창궐해도 브라질, 콜롬비아, 칠레, 페루, 여러 곳에서 시위가 멈추지 않고 한편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난무한다.
어찌 그들을 야만적이라 비난만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과거 정복자들이 그랬듯 폭력을 사용해 목소리를 낼 뿐이다. 페루에서는 최초의 인디오 출신 대통령이 될 공산주의자 카스티요 주연의 드라마가 대기 중이다. 그는 가브리엘 신부의 지도 없이도 공평한 페루를 만들 수 있을까? 중남미의 작금의 혼란은 인종과 문화의 혼혈이 빛을 발하기 위한 산통이리라 믿는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