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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맞춤양복 수요 1%가  내 고객"... ‘대한민국 양복명장’

입력
2021.07.02 23:40
14면

<62> 부산 양복점 국정사

제주에서 '육지' 부산으로 건너와 바느질을 시작한 지 올해로 55년. 평생을 함께한 재단대 앞에 선 부산 국정사 대표 양창선씨.

제주에서 '육지' 부산으로 건너와 바느질을 시작한 지 올해로 55년. 평생을 함께한 재단대 앞에 선 부산 국정사 대표 양창선씨.

“부산의 정통 맞춤양복 수요 가운데 1% 정도는 우리 가게 고객일 겁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 부산 유일의 ‘대한민국 양복명장’이 운영하는 양복점 등 거창한 단어의 수식을 받는 ‘국정사(國正社)’는 일반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해운대구 센텀시티의 한 대형 오피스빌딩 2층. 길을 가다 화려한 쇼윈도에 끌려 들어오는 가게, 아무나 찾는 가게가 아니라는 뜻이다.

국정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나라가 바로 서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김필곤(작고)씨가 창업했다. 현재 국정사 대표 양창선(73)씨는 1981년 김씨로부터 가게를 인수한 2대 사장이다. 국정사는 맞춤양복 시장의 부침에 따라 부산에서 일곱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해운대구 센텀시티로 가게를 옮긴 것은 최근이다.

제주 애월이 고향인 양씨는 18세 때인 1966년 막연한 꿈을 갖고 가출했다. 추석 다음 달 무작정 육지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그는 다음날 오전 부산에서 '별천지'를 맞게 된다.

부두에 내려 처음 발길을 향한 곳은 당시 부산 최대 번화가 광복동과 남포동. 수많은 양복점과 양장점, 제화점들이 부산의 최신 유행을 제조하던 곳이었다. 양복 기술이 배우고 싶었던 그는 매일 양복점 골목을 누비며 이곳저곳을 노크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양복점 골목이 익숙해진 어느 날, 한 가게에서 덧문을 옮기던 직원을 돕다 양복점 사장 눈에 들어 취업에 성공한다.

그가 처음 바느질을 시작한 현대복장사는 부산에만 3곳, 서울과 울산에 분점을 두고 있던 부산 최대 양복점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은 그의 실력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3년 정도 근무한 그는 동료 선배가 창업한 코코양복점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10년간 숙련의 기회를 갖게 된다. 1970년대는 세관 등 '힘 있는' 관청의 공무원, 원양어선 마도로스가 주요 고객이었다.

실력과 성실로 국정사 새 주인

1981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부산 최고 전통의 국정사가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기성복 출현이 몰고 온 사양화 물결을 버텨내기에는 창업주 김씨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김씨는 국정사 후계자로 양씨를 택했다. 실력과 성실성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터였다.

양씨는 국정사 인수 첫해 겨울 남포동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가게를 소실하는 등 큰 위기를 맞는다. 이후 천막을 쳐놓고 재개한 장사에서 죽기살기로 승부를 걸어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끄는 등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1970년대 부산 광복동 시절의 국정사. KBS2 화면 캡처

1970년대 부산 광복동 시절의 국정사. KBS2 화면 캡처

국정사의 전성기는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기성복이 갈수록 위세를 떨쳤지만 ‘최고’, ‘명품’을 추구하는 소수의 취향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최고’는 살아남았다.

당시 맞춤양복은 ‘최고’들의 전유물이었다. 관선 시절 부산시장을 지낸 인사는 거의 국정사 단골이었다. 내로라하는 기업인, 유명인은 물론, 유흥가를 주름잡던 주먹 세계 보스도 있었다. 양복지 샘플을 보여주면서 "이게 최고입니다"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범죄와의 전쟁’ 기간 수감생활을 하게 된 보스들은 출소를 얼마 앞두고 종종 양씨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출소 당일 입을 양복 가봉을 위해서였다.

1980, 1990년대는 맞춤양복 선물이 유행했다. 잘 나가는 기업은 한해 몇 백 개의 양복상품권을 돌렸다. 유사상품권 단속이 나오기도 했지만, 로비 용도로 상품권을 구입해간 측 인사를 확인하는데 그쳤다. ‘좋은 시절’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전까지 이어졌다.

1998년 1월 인근 부산시 청사가 중앙동에서 멀리 연산동으로 옮겨가면서 광복동, 남포동 상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번화가엔 사람 발길이 줄었고, 거리의 주인은 젊은이들로 바뀌었다. 기성복을 더 선호하는 이들이다. 양씨는 2010년 새 고객을 찾아 해운대구 유명 호텔로 이전을 단행한다. 범일동-광복동-남포동(화재)-남포동-광복동에 이어 여섯 번째 이동이었다.

국내 유명 디자인학교 SADI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아들 필석(40ㆍ왼쪽)씨는 대를 이어 ‘대한민국 양복명장’이 되겠다며 아버지를 돕고 있다.

국내 유명 디자인학교 SADI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아들 필석(40ㆍ왼쪽)씨는 대를 이어 ‘대한민국 양복명장’이 되겠다며 아버지를 돕고 있다.


장애인 제자, 기능올림픽서 '금'

양씨는 2005년 전문기술인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 양복명장’에 오른다. 양복부문은 그동안 전국에서 10여 명의 명장이 선정됐지만, 부산에선 양씨가 유일하다. 업계 사양화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론 명장 배출이 어려울 것이란 게 양씨의 분석이다.

양복명장 신청 자격은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업계 종사 경력이 15년 이상 돼야 한다. 자신의 숙련 기술을 증거하는 기능대회 입상 실적이 있어야 하고 기술을 스스로 고도화시켜야 한다. 또 그 능력을 바탕으로 펼친 사회봉사 실적 등이 있어야 한다. ‘생업’이 버거운 양복업계 현실에서 ‘명예’를 찾아 나설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는 30년 전부터 장애인들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성장을 도왔다. 자신의 성공 스토리에 그들도 역경을 딛고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동안 자신의 가게를 거쳐간 장애인 제자들이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따낸 메달이 수십 개에 이르고, 2011년엔 그 제자 하나가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일반인을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양씨는 교도소와도 인연을 갖고 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출소 후 자활을 돕기 위해 10년 넘게 기술 전수 봉사를 했다. 재소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들이 지은 옷을 팔아 교도소에 필요한 비품을 구입하게 하거나,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등 ‘교화위원’의 역할에 그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요즘 국정사를 찾는 고객은 거의가 기존 고객의 가족이거나 혼사로 가족관계가 새로 이뤄진 경우다. 명품 맞춤양복 애호가인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나이가 들어 다시 아들에게 자신의 단골집을 소개해 인연이 되는 경우다. 손자까지 3대째 국정사를 찾다 최근 숨을 거둔 한 고객은 평생 250여 벌을 지었다 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 오랜 기간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 우수 소상공인의 성공모델로 부산 최초의 양복점, 국정사를 ‘백년소공인’ 가게로 선정했다.

패션디자인 전공 아들이 승계

바느질을 시작한 지 올해로 55년. 칠순을 넘긴 그가 지속가능한 경영환경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아들 필석(40)씨 덕분이다.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필석씨는 대를 이어 ‘대한민국 양복명장’이 되겠다며 10년 넘게 아버지를 돕고 있다.

부산의 요지로 부상한 해운대구 센텀시티로 새로 옮긴 가게에서 아들 필석(왼쪽)씨와 함께 포즈를 취한 양창선씨.

부산의 요지로 부상한 해운대구 센텀시티로 새로 옮긴 가게에서 아들 필석(왼쪽)씨와 함께 포즈를 취한 양창선씨.

최근 부산의 요지 중 요지로 떠오르는 해운대구 센텀시티로 가게를 옮긴 것도 젊은 감각의 필석씨 영향이 컸다. 기존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새 수요층과 호흡하며 변화를 모색하겠다는 뜻이다.

필석씨는 “시대에 따라 소비자 니즈는 변할 수밖에 없고, 그 흐름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제조업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차원 높은 테일러링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당면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일례로 양복 맞춤과정의 기본인 고객 신체치수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 의류쇼핑몰 등의 플랫폼과 연동해 사이즈 선택에 도움을 줌과 동시에 사이즈 착오로 인한 반품과정을 줄이는 등 유통과정에서 저탄소 기반 서비스 구축이 가능한 사업 모델을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양창선씨는 “세월을 이길 수 없듯 양복장이로서 저의 시대는 저물어간다”면서 “아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잘 엮어 100년을 넘기는 최고의 맞춤양복 브랜드로 성장시켰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목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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