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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얼굴도 모른 '11개월 옥살이'… 곡성 성폭행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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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2015년 12월 30일. 누군가 김현승(가명·62)씨가 살던 빌라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전남 곡성, 김씨는 인근 휴게소에서 호두과자점을 운영하며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연 김씨를 향해 한 중년 여성이 큰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만취한 듯 보였다. "우리 조카를 성폭행했죠? 맞지요?" 김씨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부인했다. 하지만 여성에겐 진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결국 112로 전화를 걸어 경찰을 불렀다.
②2017년 3월 31일. 김씨에게 징역 6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자신의 집을 찾아온 중년 여성이 15개월 전 언급했던, 조카 A(당시 19세·지적장애인)양을 성폭행한 혐의(장애인 위계 등 간음, 주거침입 등)였다. 2014년 3차례에 걸친 상습 성폭행, 그러나 김씨는 "피해자의 얼굴도 본 적 없다"며 수사기관과 재판정에서 무죄를 호소했다. 2016년에는 A양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씨의 주장을 모두 허위로 판단했다.
③2019년 1월 31일. 항소심 재판부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17년 9월 21일, A양이 직접 법정에 출석해 "(김씨가) 성폭행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다. A양은 "고모가 시킨 일"이라며 "성폭행한 사람은 사실 고모부"라며 고개를 숙였다. 재판부는 11개월간 복역 중인 김씨의 보석을 허가했다. 1년여 지난 2018년 9월, A양이 지목한 고모부는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됐다.
김씨는 '무고에 따른 억울한 옥살이'의 책임을 묻고자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최근 1심 재판에서 졌다. 경찰과 검찰 수사에 미흡한 점이 있지만, 책임을 물 정도의 잘못은 없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김씨는 곧바로 항소했다. 그는 4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하겠다고 임신한 몸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던 딸을 위해서라도 국가 책임을 인정받아야겠다"고 밝혔다.
김씨의 형사 1·2심 및 민사 소송 판결문에 따르면, 지적장애인인 A양과 언니는 2013년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마저 장애인보호시설로 들어가면서 고모 B씨 부부와 전남 함평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학교도 그만둔 상태였다.
이 때 김씨 사건과 '판박이'처럼 닮은 첫 사건이 발생했다. A양의 언니가 고모에게 "고모부가 동생을 성폭행한 것을 봤다"고 털어놨지만, 고모는 남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되레 이웃을 가해자로 지목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이웃 C씨가 한 일"이라는 남편의 말만 믿은 듯, 경찰에 C씨를 범인으로 신고(이하 '함평사건')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A양에게는 경찰 조사에서 말할 모텔 이름과 피해 내용을 교육하며 허위진술하도록 강요했다. 다만 검찰은 A양의 진술이 일관적이지 않고 증거가 부족했다고 판단, 2014년 6월 C씨를 불기소 결정했다.
더 이상 함평에서 살기 어려웠던 고모 내외는 자매를 데리고 곡성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김씨를 상대로 함평사건과 똑같은 범행을 했다. 2015년 12월 30일 만취한 채 김씨 집을 불쑥 찾아가 조카의 피해를 주장했던 고모는, 이후 A양을 파리채와 효자손으로 때리며 "1층 아저씨(김씨)에게 무조건 성폭행당했다고 하라"고 강요했다. 경찰이 A양을 대상으로 선면수사(여러 인물 사진을 피해자에게 보여주고 범인을 특정하게 하는 수사)를 할 때에도 고모는 A양 바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찰은 A양과 고모의 진술을 그대로 믿었다. A양이 피해장소에 대해 일부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지만, 경찰은 피해장소로 꼽혔던 모텔 폐쇄회로(CC)TV를 확보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씨 카드 사용목록에 해당 모텔 결제내역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도 "김씨를 기소해야 한다"며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무엇보다 수사팀 중에는 앞선 함평사건을 다뤘던 경찰관도 있었다. 고모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법했지만, 김씨의 기소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씨의 결백을 입증하겠다고 나선 이는 둘째 딸 정은(가명·34)씨였다. 아버지가 살았던 곡성에 자리를 잡고, 1년 가까이 이웃을 만나고 설득했다. 임신한 몸에 스트레스를 버티지 못하면서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웃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웃들은 A양 고모 내외가 평소 A양에게 고된 사료배달 일을 시키는 등 학대 사실을 확인해줬다. 고모 내외를 피해 가출한 A양을 찾아 설득, '고모가 시켜서 허위 진술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A양이 법정에 나와 고모부의 범행을 털어놓은 것도 딸 정은씨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정은씨가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겠다고 쓴 돈만, 변호사 선임비 등 3억 원이 훌쩍 넘었다.
실형 6년 선고 받은 후 항소심에서도 무죄 확률이 99.9% 없다고 할 때 저는 죽음을 결심하면서 변호사들의 합의 권유를 수용 하지 않았으며 무죄 선고후에도 경찰은 각자 진급하여 근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과 한번 없고 경찰에서도 경고 한 장 없습니다. 검찰은 귀책사유가 없다며 재판부는 답변서 결어 끝부분에 “무고로 인해 무고한 옥살이를 인정” 이란 문구로 마무리 했습니다. (중략)
평범한 서민인 저는 거대한 힘을 가진 국가권력에 의해 삶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인격살인을 당하여 매장되었지만, 누구 하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성폭행법의 처와 딸이 되여 모두가 비난하는 현실에서 제 딸이 발로 뛰면서 사실을 규명 하였습니다. 그 후 부실수사와 증거조작한 경찰공무원에게 처벌과 사과를 요구 하였지만 사과도 없이 유죄증거가 충분했다는 망언과 또 저보다 억울한 사람도 있다는 사회적인 외면과 무관심이 현실입니다.
김씨 가족은 당연히 경찰과 검찰, 법원에게 부실한 수사와 재판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난달 18일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를 상대로 1억9,000여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한 김씨에게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취지였다. △A양에게 유도질문한 경찰관은 미흡했으나 법규상 정당성이 결여됐다고 보기 어렵고 △모텔 CCTV와 카드결제내역에 대한 추가 조사를 하지 않은 경찰의 수사 역시 법규상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김씨와 정은씨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되면 누가 경찰과 검찰, 법원이 잘못을 뉘우치게 하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사건을 겪기 전까진 사법시스템이 이렇게까지 왜곡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정은씨도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했는데,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사과 한 마디도 없었다"라며 "아버지 같은 사례가 어딘가에서 또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하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손해배상청구 항소심은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가 맡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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