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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마사지로 살려낸 트럭운전사, 두 다리 잃었지만...

입력
2021.07.13 17:00
수정
2021.07.13 18:37
25면

<20> 여한솔 응급의학과 전공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힘들기로 유명했던 본원 응급실 인턴 근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퇴근 20분 전 응급실 근무를 탈 없이 마쳤다는 안도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119 사이렌이 울리며 환자가 실려 들어왔다. 37세 남성환자, 트럭운전사, 맞은편 차량과 정면 충돌했다. 트럭은 종이짝처럼 찌그러졌고, 환자는 가슴이 운전대에 끼어 있는 채로 있다가 구조되었다고 한다.

그곳 응급실은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어 있었다. 중증외상 환자가 오면 '트라우마팀 콜'이 작동된다. 흉부외과, 신경외과, 외과, 정형외과 전문의가 곧바로 호출되는 프로토콜에 따라 각 교수님들이 소생실로 몰려들었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의식은 혼탁했고, 수축기 혈압이 60을 넘지 않는 초응급 상황이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선생님이 빠르게 초음파로 환자를 평가했다. 환자는 외상에 의한 심장눌림증이었다. 내원 5분이 되지 않아 환자는 심정지가 발생했고, 곧바로 나를 포함한 여러 인턴이 투입돼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몇몇 교수님들의 상의 후 곧바로 개흉술을 통해 심장마사지를 시행하기로 했다. 환자의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내 손바닥과 2㎝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교수님은 커다란 수술용 도구로 환자의 앞가슴뼈를 잘라내고 있었다. 흉측한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심폐소생술을 멈출 수 없기에 흠칫 놀라는 내 눈빛을 교수님께서 알아차리셨는지 "걱정 마, 네 손은 자르지 않을게"라며 거침없었다.

교수님의 침착한 개흉술에 뛰지 않는 심장이 노출되었고, 인턴인 나는 심장을 직접 손으로 마사지했다. 말로만 듣던 심장마사지를 하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아직도 아찔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모든 의료진이 모여 환자 살리기에 여념 없었다. “나이가 깡패니까 한번 해보자. 이것만 잡으면 환자 산다”라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심장마사지를 하며 심장이 뛰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여러 교수님의 상의 후 곧바로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흉부외과 교수님이 환자가 누워 있는 카트 위에 걸터앉아 심장마사지를 지속하며 수술방으로 올라갔다. 입고 있던 당직복은 힘들어서 흘린 땀 절반, 하얗게 질려버린 충격으로 인한 식은땀 절반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응급실 마지막 근무는 그렇게 하얗게 불태우며 끝이 났다.

다음 날 마취과 전공의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자는 수술방 침대로 옮겨지지도 못한 채 환자를 옮기던 침대 위에서 수술을 진행했다고 한다. 9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환자는 중환자실로 올라갔다고 했다. 살아서…

며칠이 지나 그 환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는 또 다른 인턴 업무에 휘둘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외상 중환자실 인턴 업무를 위한 당직을 서고 있는데 밤 12시, 정형외과 전공의 선생님이 같이 드레싱을 하자며 올라오라고 했다. '밤 12시에 무슨 드레싱이야.' 구시렁거리며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니 어디서 많이 본 환자가 격리실에 누워 있었다. 십수일 전에 보았던 그 트럭운전사 환자가 아닌가! 환자는 의식이 명료한 상태로 드레싱 키트를 챙겨오는 우리를 익숙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환자의 몰골은 처참했다. 수십㎝에 달하는 흉측한 가슴절개자국이 선명했고, 한쪽 다리는 무릎 아래로 절단되어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다른 한쪽은 허벅다리 중간까지 절단된 채로 피부가 봉합되지 않은 채 열려 있었다. 멸균 드레싱을 하는 1시간 반 동안 정형외과 전공의를 도왔다. 당시 외상 중환자실 당직을 섰던 인턴들은 날마다 이 드레싱을 시행해야 했기에 야간 업무가 지옥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며칠이 지나 이번엔 마취과 수술방에서 마취기록을 남기는 인턴 업무를 하는 중이었다. 카트에 실려오는 환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때는 놀랍지도 않았다. 바로 그 환자였다. 차트를 확인해 보니 환자는 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가 개방 골절됐지만 사고 당일 정형외과적 수술은 진행도 못한 채 중환자실로 왔고, 심폐소생술 내내 양다리에 피가 공급되지 못해 썩어 모두 절단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중 한 다리에 대한 처치가 끝나지 않아 이날 수술이 잡히면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그 트럭운전사 환자가 퇴원한다고 인턴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비록 평생 휠체어 또는 의족을 이용해 생활해야겠지만, 그래도 의식이 명료한 채로 살아서 퇴원했다. 정말 나이가 젊어서 가능했던 것일까.

시간이 흘러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일하면서 이러한 중증 외상 환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가슴에 피가 가득 고이고 다리가 으스러지고 골반이 뒤틀려 부러진 환자들을 마주할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드레싱할 때 나를 바라보던 그 환자의 눈빛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두 다리가 잘려 나간다면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소중한 것 아닐까.

적절한 처치를 통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과 중 하나인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것이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지원서류에 '사람 살리고 싶어 지원했다'는 그때의 패기를 오늘도 마음에 새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 다리를 포기해가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트럭운전사의 생존을 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그 환자가 부디 두 다리를 잃은 슬픔을 꿋꿋이 이겨내고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시길 기도한다.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인이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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