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의 연대기

입력
2021.07.01 20:0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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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할 게 하나 있다. 나에게는 혀가 있다. 아니 이게 무슨 고백할 일이냐고? 정확히 이야기하자. 놀라지 마시라. 나에게는 혀가 여러 개 있다. 거울 앞에 서서 혀를 내밀어 볼 테니 잘 보시라. 지금 보이는 혀는 나의 두 번째 혀이다. 낮은 목소리 톤으로 표준어를 구사하는 교양 있는 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이 혀와 함께한다. 국가가 공교육을 통해 만들어 주고 내가 먹고살기 위해 기꺼이 선택한 혀.

나의 교양 있는 혀를 우아하게 접어 본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혀가 있다. 일명 영어 혀. 발음에 집착하지만 이 혀는 경직되어 있고, 매우 얄팍하며, 무엇보다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짧아지고 있다. 쓸모가 많다 하여 많은 돈을 들여 이 혀를 키워봤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혀 옆에는 새싹 크기의 독일어 혀가 있다. 이 혀가 할 수 있는 독일어는 이것뿐이다. 이히 하베 아이네 프라게(Ich habe eine frage). 질문 하나 있습니다. 이 혀는 질문 있다고 말해 놓고서는 정작 질문은 못 하는 그런 혀이다. 그 독일어 혀 옆에 그만큼 작은 일본어 혀가 있다. 이 혀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와카리마셍(わかりません)’밖에는 없다. 독일어 혀가 말한다. 질문이 있어요. 일본어 혀가 대답한다. 저는 몰라요. 그리고 이 혀들 옆에 엉기성기 풀줄기 몇 개를 모아놓은 모양의 중국어 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셤머(什?)? 뭐라고?

이런 자잘한 혀들을 걷어내 보자. 그 아래에는 앙상하게 말라가는 나의 첫 번째 혀가 있다. 제주도 말을 하는 이 혀는 평소에 꽁꽁 숨겨져 있다가, 부모님과 통화할 때나 감정이 격앙되어 흥분했을 때 잠깐 고개를 내민다.

나에게 두 개의 혀, 아니 여러 개의 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였다. 입시를 치르기 위해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커피숍 안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혀에 대해서는 생각이 난다. 나의 두 번째 혀는 서울 사람들의 어투와 억양을 징그러울만치 그대로 모사하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머물고 있던 친척집에 늦는다는 전화를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커피숍 전화기 앞에 섰다. 나는 첫 번째 혀가 할 말 ‘승준디예, 좀 늦을 거 닮아마씀.’과 두 번째 혀가 할 말 ‘승준데요, 좀 늦을 거 같아요.’ 사이에서 한참이나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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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다른 혀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나의 ‘가짜’ 정체가 발각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첫 번째 혀를 사용하는 것이 내가 그 커피숍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혀를 사용할 것이다. 아니다. 지금도 나는 학계의 고향 선배가 제주말로 말을 건네면, 정색을 하고 서울말로 답한다. 나의 무의식은 아직도 내 첫 번째 혀를 꺼내 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혀로 목소리를 내면, 이 자리에서 추방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아직 내게는 남아 있다.

그 커피숍에서 내가 어떤 혀를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이후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타지로 가면 제주말을 싹 버리고 그곳의 방언을 순식간에 익히는 것일까? 적어도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제주 지역 밖에서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첫 번째 혀를 철저히 숨긴다.

또 다른 질문. 강호동이나 김제동 같은 이처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을 쓰는 방송진행자들이 있는데 전라도 사투리와 억양을 사용하는 진행자는 왜 없는 것일까? ‘머선 129’처럼 경상도 방언이 밈으로 만들어져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심지어 경상 방언으로 유행가도 만들어지는 판에 왜 전라도 방언은 그런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

마지막 질문. 지방의 여성들은 왜 남성들보다 표준어를 더 빨리 익히고 더 잘 구사하는 것일까? 언어 능력이 남성들보다 뛰어나서? 반대로 지방의 남성들은 왜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표준어 사용에 질색을 하고 비표준형인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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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질문이지만, 사회언어학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힘’에서 찾는다. 사회적으로 힘이 약한 집단 또는 개인은 힘이 센 언어의 위세를 빌려와 자신의 약함을 벌충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주말을 버리고 서울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제주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힘이 약한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힘이 약한 집단에 속해 있으니, 지체할 것 없이 힘이 센 언어, 표준어의 위세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 경상도 방언 화자가 더 많이 노출되고, 전라도 방언 화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표준어가 가진 위세보다는 덜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경상도 방언과 그 화자 집단이 가진 위세는 다른 방언과 그 사용자들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혀를 버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힘이 없다면, 자신의 본래 목소리를 숨기고 다른 혀를 찾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표준어를 더 잘 구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힘이 세졌다면 표준어의 위세를 빌려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 첫 번째 혀를 버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첫 번째 혀로 만들어내는 목소리를 사회가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비표준형을 사용하는 이유는? 남성들 사이에서 같은 남자로서의 유대감은 최고의 가치이며, 비표준형의 사용은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비표준형을 사용한다면? 그렇다면 그 여성은 되바라졌다거나 조신하지 못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즉 비표준형을 사용하는 여성은 통제할 수 없는 야생의 존재, 계몽되지 않은 존재로 취급당한다. 아니라고? 영화 속 욕쟁이 할머니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라. 반면 표준어를 사용하는 여성은 계몽된 존재, 정숙한 여인으로 인식될 것이다. 자기 본래의 목소리를 낼 수 없어 표준어를 사용했는데, 그 순간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 이렇게 보면 여성들은 이중의 덫에 포획되어 있는 셈이다. 자고로 여성들은 말하되 말하면 안 되는 존재들, 혀가 있지만 혀를 숨겨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어쩌다 목소리가 새어 나와도 여성의 말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여성들의 목소리는 봉쇄당해 왔다.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향해, 이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저 혀를 잘라라. 저 혀를 잘라라. 저 혀를 잘라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타투인들과 함께 타투입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타투인들과 함께 타투입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이런 저주가 들린다. 근래 들어 가장 눈에 뜨이는 사례는 한 젊은 여성 정치인에 대한 반응들이다. 공정을 말하는 젊은 남성 정치인의 혀는 추앙받지만, 젊은 여성 정치인에게는 욕설에서부터 성희롱, 점잔 빼는 충고와 비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내게 그 대부분의 반응은 ‘저 혀를 잘라라’라는 저주의 수많은 변주처럼 보인다.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자신의 등에 타투를 그려 공개한 여성 정치인에게 그들은 묻는다. 왜 그따위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왜 좀 더 ‘정상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왜일까? 답은 자명하다. ‘새파랗게 어린’ ‘여성’의 목소리를 이 사회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라고 해봤자 새파랗게 어린 여자일 뿐이고, 그런 여자가 말을 해봤자 그 말은 가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를 벌이는 젊은 여성 정치인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내용이다. ‘어이,’ 내가 말할 테니 너는 그냥 들어. 시끄럽게 쓸데없는 말 떠들지 말고. 이러니 별수 있나?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듣게 하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서 그 정치인은 기어코 타투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했다.

이 정치인은 원피스를 입었다고, 점프 슈트를 입었다고, 운동화를 신었다고, 맨 등을 보였다고 공격당한다. 모든 것이 과하다고, 도를 넘었다고, 무엇보다도 네가 하는 일은 가치가 없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이 정치인이 비난받는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혀를 숨기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내 입안의 혀들이 말한다. 그의 혀가 숨지 않기를, 더 큰 목소리를 내기를 기원한다고. 더 많은 이들이 숨겨둔 자신의 혀를 발견하기를, 그 혀로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를 빌어본다고.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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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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