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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천장을 데이며 먹던 가락국수여

입력
2021.06.30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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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은 청량리에서 출발, 수많은 난코스를 지나서 경상북도 내륙으로 넘어간다. 거리는 짧지만 철길이 구불구불해서 속도가 느리다. 송영의 소설 '중앙선'의 한 장면처럼, 깨진 유리창 밖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청량리 개찰구가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뛰어서 자리 잡기 전쟁이 벌어졌다. 명절이나 여름 휴가철에 더 심해졌는데, 자리를 못 잡으면 지옥 같은 여행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주를 지나 안동까지 간다면 일고여덟 시간을 ‘발끝’으로 서서 가야 했다. 발바닥마저도 온전히 붙일 수 없었다. 겨울엔 차라리 다른 이의 체온을 빌려서 갔다 치지만, 여름엔 참으로 고역이었다. 어떤 이는, 혼잡을 피해 짐 올리는 선반 위에 올라가 누웠다가 차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고된 여행객을 뚫고 은마차 아저씨는 열심히 다녔다. 홍익회 판매원이 끌고 다니는 작은 손수레는 반짝이는 금속제여서 은마차라고 불렀다. 사실, 열차 여행의 재미는 음식이었다. 얼마나 많은 음식이 우리를 유혹했던가. 조제약 봉지처럼 접은 소금을 곁들여주던 삶은 달걀, 꼭 ‘한정판매’하던 도시락이며, 바삭바삭한 유과며, 한겨울 나일론 망에 담아 팔던 노란 귤에 아재들이 좋아하던 오징어와 병맥주까지. 맥주를 시키면 판매원들이 신이 나서 펑펑 소리 나게 병을 따서 내밀었다.

중앙선의 백미는 원주역 가락국수였다. 이때도 백미터 달리기처럼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서서 먹는 판매대에 먼저 도착해야 그나마 느긋하게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었으니까. 뒤늦게 국수를 받아든 이들은, 역무원 아저씨들이 탑승을 재촉하는 호각소리에 급히 국물을 삼키다가 입천장과 식도를 몽땅 데이는 게 다반사였다. 그마저도 다 못 먹으면 먹다 남은 그릇을 들고 뛰기도 했는데, 한손에 든 가락국수 그릇 밖으로 국물을 흘리지 않고 잽싸게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는 기술을 보여주는 형들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일회용 그릇이 나오면서 그릇을 들고 탈 수 있게 되었던 1980년대 초반의 일인 것 같다. 국수를 사들고 객차에서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국수 반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었지. 아마도 싸구려 멸치와 화학조미료로 맛을 냈을, 퉁퉁 불어버린 국수가 더 맛있게 느껴졌던 때였다. 지금은 가락국수 판매대도 없고, 있더라도 시켜먹을 수 있을 만큼 열차가 오래 정차하지도 않는다.

대전역 플랫폼에 한동만 국숫집이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가락국수의 서정은 없으리라. 입천장을 데이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싸주시던 삶은 계란과 김밥이며 미지근한 사이다 맛도 이젠 없어졌다. 기차는 우리에게 속도만 제공할 뿐, 어떤 기억도 남겨주지 않는다. 아, 오후가 되면 홍익회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받아온 석간신문을 팔았는데, 심지어 그날의 톱뉴스를 외치면서.

“봉황기 고교야구 결승 소식, 따끈따끈한 석간신문 있슈미다아.”

무궁화호며 새마을호도 점차 운행량이 줄고, 고속열차만 씽씽 달린다. 고속열차에서는 무얼 먹기도 어렵다. 도시락이나 햄버거라도 열었다가는 다들 무슨 냄새인가 불편을 드러낸다. 식당칸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자동판매기를 이용해 주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올 뿐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대에 도착하니, 잠시의 허기를 참는 것이 공공의 미덕이 되었다. 그나마 코로나 시대에는 취식이 아예 금지다. 물을 마실 때도 눈치를 살피며 숨을 멈추고 마신다. 마스크를 벗고 딱 한 숨을 내뱉는 것도 불가능해진 세상이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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