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렉카 정치라는 조롱

입력
2021.06.30 00:00
수정
2021.06.30 09:06
27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오대근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오대근 기자


국회 보좌진들과의 세미나 자리에서 ‘여의도 렉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정치권을 상징하는 ‘여의도’와 견인차를 뜻하는 ‘렉카’의 합성어로, 국회 관련 비공식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익숙한 용어란다. 온라인에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짜깁기 영상을 올려 조회 수를 늘리고 그러다 아니면 말고 식의 행태를 가리키는 ‘사이버 렉카’라는 말의 '국회 판' 같았다.

현직 국회의원 주모 비서관은 ‘여의도 렉카 현상으로 본 우리 의회정치’라는 토론문에서 여의도 렉카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고 현장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렉카처럼) “단시간에 쟁점이 된 사안에 먼저 개입해 정치적 이득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태 혹은 그런 행태를 보이는 정치인들을 낮잡아 이르는 신조어다.” 렉카 정치는 몇 개의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어느 한 진영의 편에 선다. 둘째, 이슈의 당사자를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진다. 셋째, 관련 국가기관의 개입을 촉구한다. 넷째, 사안과 관련한 법안을 발의한다. 다섯째, 여론의 관심을 얻고 입법 실적도 쌓았으니 그 뒤는 ‘나 몰라라’ 한다.”

남들보다 빨리 이슈에 개입해 주목을 받고, 추후 발생하는 갈등과 책임은 국가기관에 떠넘기고, 또 다른 이슈에 빠르게 출동하는 것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것, 그게 렉카 정치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주 비서관은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계량화 만능의 실적주의”다. 국회의 본래 기능인 갈등조정과 사회통합 기능은 사라졌다. 의원들 사이의 우애나 동료애는 찾아볼 수 없다. 법안 발의와 언론 노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국회다.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을 입법 실적으로 면피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분식할 수 있다. 법안의 수나 언론 기사의 빈도로 의정활동이 평가되는 상황에서 렉카 정치는 효과적이다.

둘째, 정치영역이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여야 사이의 적대와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의원들이 정치력을 발휘할 공간은 좁아졌다. 여야 대결상황이 풀린다 해도 원내대표 간 일정이 합의될 때까지, 의원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국회 일정이 시작된다고 해도, 처리 안건은 원내 지도부와 간사 간 합의에 따른다. 개별 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임위 전체 회의에서 행정부에 질의하는 정도다. 의원들은 ‘스스로 빛나고 싶어 하는’ 특별한 존재다. 단시간에 이목을 끌 수 있는 어떤 이슈라도 찾으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빛나야 한다. 의원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이끄는 양극화 정치가 여의도 렉카를 부른다.

렉카라고 조롱받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상황이 나빠졌어도, 의원은 시민 대표이자 입법자로서 책임 있고 권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론에 아첨할 의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중요한 의제를 챙겨야 한다. 법안을 남발하는 의원은 비난받아야 한다. 꼭 필요한 법안을 충분히 준비하고 검토해 발의하는 의원이 더 좋게 평가받아야 한다. 절박함을 호소하는 이해당사자를 만나고 갈등을 조율하고 현실적인 최선을 찾아내야 한다. SNS에 올린 글로 기사에 나는 렉카 의원도, 그런 기사를 쓰는 렉카 언론도, 민주 정치의 파괴자로 취급받아야 한다. 정치인이 존경받지 못하면, 언론이 언론답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여의도 렉카라니, 이게 웬 말인가.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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