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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과 함께한 군위 여행 '일상의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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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은 경상도 사투리를 잘했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 내비친 자신감이지만 근거가 없지는 않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이면 방안에 경상도 사투리가 넘실댔다고 한다. 사투리로 랩을 한 적도 있다. ‘바퀴벌레(Catch me if u can)’라는 곡에서였다. 신해철의 사투리 실력의 뿌리는 군위다. 본관이 군위군 효령면이다. 본인은 대구 사투리라고 했으나 정밀하게 따지면 군위말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그는 군위라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군위는 왕건의 부대가 이 지역을 지날 때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군사의 위세를 기념해 지어준 지명이라고 전한다. 군위라는 지명이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다. 믿음은 뿌리 깊은 신념으로 남는다. “군위 남자는 어디 가서 살아도 위세를 잃으면 안 된다!” 이런 가르침을 후손 대대로 남기지 않았을까. 많은 경우 실체보다 믿음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마왕’의 위세는 군위에 뿌리를 내리고 산 선대의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는 분명 가수를 넘어서는 위세가 있었다. 정치인들과 논객들만 명함을 내민다는 토론 프로(100분토론)에 나와서 목소리를 높이고 죽을 때까지 나름의 카리스마와 주관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팬데믹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까. 팬들에게 투표를 하면 이번 만큼은 그의 독설보다는 위로를 전하는 노래를 듣고 싶을 듯하다. ‘일상으로의 초대’는 어떨까.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일상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지만, 노래 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일상의 풍경도 우리에게는 초대하고 싶은 대상이다. 이 시절의 핵심 키워드인 ‘거리 두기’는 일상으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과 일상 모두를 집어삼켰다. 일상 자체를 초대하고 싶은 일상의 연속이다.
“군위는 마카 다 맛있다.”
여행에 앞서 군위에 사는 분에게 맛집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모두(마카) 맛집이라는 것. 식당에서 그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시골 식당은 대부분 집에서 만든 반찬을 내놓는다. 밥도 자기 집에서 수확한 쌀로 짓는 식당이 많다. 요컨대, 음식의 출처가 분명하다. 이날 일행의 젓가락이 가장 많이 간 접시는 김치 종지였다. “할머니가 담그신 것”이라는 식당(들국화) 주인의 설명도 있었지만 딱 봐도 군위산 김치였다. 식사 자리에 함께한 군위 주민은 “서울이나 대구에서 오신 분들은 김치 나오면 감탄부터 내뱉는다”면서 “마치 김치 관광을 온 사람들 같다. 실제로 군위 김치가 맛있다”고 말했다. 중국발 김치 대란이 불러온 즐거운 재발견 열풍인 셈이다.
음식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식당과 같은 공간에 들어와 앉은 작은 커피숍이었다. 버섯전골식당과 커피숍의 만남이 힙했다. 역시나 사장이 젊다. 사장과 종업원 모두 30대였다. 사장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고향인 군위로 내려온 귀농 청년이었다. 전골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진한 커피향이 뒤섞이는 독특한 음과 향의 향연, 이 식당이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작은 일상의 축제다. 한끼 식사를 작은 축제로 승화시킨 파격은 어디에서 왔을까. 외부로 향하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기계처럼 공부에만 파고드는 공시생 생활을 겪으며 이런 소소한 즐거움의 가치를 깨달았을 것이다. 책상머리에 벌레처럼 붙어있다가 이런 즐거운 일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이런 파격이 공시생의 상상과 기획에서 비롯되었다면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식사 한끼로 벌써 여행의 행복감이 차오른다.
군위 하면 자전거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덕분이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 속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장면은 관객의 체험 욕구를 자극하기 딱 좋다.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험도 자전거 타기다. 영화처럼 음식을 만들거나 지붕을 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딱히 체험할 거리라곤 자전거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촬영지에서 요리 교실이 열린다고 해도 ‘바람 맛’은 최고의 체험이다.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고향에서 만난 것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맞은 바람을 닮았다. 군위에서의 일상 하나하나가 가짜 감정과 위조된 정서를 씻어냈다. 땀 흘린 결과가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노동, 자연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싱싱한 음식, 친구들의 에두르지 않는 말들, 자연이 빚어내는 소리, 냄새, 그리고 선물처럼 다가오는 풍경들이 바로 그렇다. 서울에서의 일상을 곱씹으며 쉬던 안방, 삼시 세끼를 해결하던 주방, 아침 운동을 하던 마당, 자전거를 타고 내닫던 마을 길이 그저 동떨어진 영화 속 장면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테면, 뒷담 너머로 유채꽃이 한창이었는데, 그 노란 빛에 잠시라도 세상을 다 잊었다면 우리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잃어버린 일상의 감각을 되살리는 시간을 가진 셈이다.
시골로 내려와 얻은 여유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주인공의 삶은 느려지고, 여유로워지고 또 담백해졌다. 하고 보니 코로나19가 불러온 공백 같은 일상과 닮아 있다. 어떤 냄새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일상에 알알이 박힌 소중한 것들에 대한 감각도 무뎌진다. 숫기라곤 없어서 좋아하면서도 말도 걸지 못 하는 못난이처럼 소리 없이 숨죽인 채 우리의 눈에 띄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람들과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깨닫는 동시에 혼자 새벽까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 성숙해가는 느낌을 가지는 일 역시 그에 못잖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전거를 타고 가듯 천천히 흘러가는 삶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재발견하게 하는가, 너무 바삐 사느라 접어둔 일상을 다시금 끄집어내게 하고 있는가. 일상을 빼앗은 ‘괴물’(코로나)이 우리에게 남기는 뜻밖의 선물 역시 ‘일상’이다. 아이러니다.
그렇다. 한 번씩 멈추어야 한다. 멈추지 않는 것은 없다. 낮도 멈추고 밤도 멈춘다. 지긋 지긋한 추위도, 상큼한 봄바람도, 미친 듯이 녹색을 팽창시키는 여름도 언젠가는 멈춘다. 사람만 달린다. 일도, 밥도, 술도, 노래도 밤낮의 경계까지 지워가며 쉬지 않고 달린다. 급기야 너무 지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상은 학대받는 개처럼 세상을 향해 쾅쾅 짖어댄다. 의미와 정서가 모두 말라버린 짐승 같은 일상이다. 괴물로 변해버린 일상과의 거리 두기,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가 아닐까.
짧은 여행의 종착지는 화본역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곳. 현재는 역무원이 없고 기차가 정차만 한다. 간이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 오는 날이나 벌레들이 짝을 찾는 소리에 숨이 막히는 가을밤이라면 모를까, 한낮의 화본역은 그닥 마음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
여행자의 권리인 ‘설렘’을 소환해준 것은 고소한 빵 냄새였다. 역전에 꽈배기를 팔고 있었다. 사람 숫자대로 사서 문을 닫은 커피숍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천천히 먹었다. 그때서야 사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 살펴볼 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빵맛에 마음을 빼앗겨 간이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나서야 쭈뼛쭈뼛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구나, 여행에서 마저 우리는 타락한 일상처럼 조급하게 서둘렀구나.
돌아오는 길에 여염집 마당에 앉아 있는 누런 개 한 마리를 마주쳤다. 꼬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뛰어놀기 딱 좋은 날씨였지만 누렁이는 그저 먼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편을 선택한 듯했다. 온갖 소음과 사람들의 손길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도심의 개들과 비교하면 너무도 평온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다가서도 한번 쓱 쳐다보고 말뿐 짖지도 무언가를 얻으려고 꼬리를 흔들어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일상은 성품이 된다! 일상에 채워진 족쇄들이 풀리고, 거리가 다시 좁혀지더라도 이유 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군위에서 얻어온 가장 훌륭한 여행의 소득이다. 일상이 늘 설레고 사랑스러워지려면 신해철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그녀’도 좋겠지만 일상을 너무 혹사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상이 곧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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