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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대선으로... '대망 실현' 위해 '헌법 가치' 눈 감았다

입력
2021.06.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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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감사원장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에 출근하며 사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최재형 감사원장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에 출근하며 사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최재형 감사원장이 28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내년 1월 1일까지인 감사원장 임기(4년)를 6개월 남기고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최 원장의 사표를 지체 없이 수리했다.

최 전 원장의 사퇴는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는지 숙고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대권 도전을 공식화하는 '시점'만 남았다는 뜻이다.

최 전 원장의 대선행이 위법은 아니다. 최 전 원장은 헌법에 따라 피선거권을 보장받고, 공직선거법상 ‘대선 90일 전 공직 사퇴’라는 법적 요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의 행보가 무결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감사원은 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을 감찰·감독하는 대통령 직속의 헌법기관이다. 헌법이 감사원 설치 근거를 명시한 건 정치적 중립성·직무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감사원 중립성·독립성의 보루여야 할 현직 원장이 특정 정파의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중도 퇴진한 것은 헌법 가치를 흔드는 것이다.

이회창 김황식 전 감사원장이 대선에 출마하거나 대권 도전을 준비한 적은 있지만, 최 전 원장처럼 선거로 직행한 경우는 없었다.

최 전 원장은 28일 서울 종로구 감사원으로 출근하면서 기자들과 만나 “저의 거취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감사원장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며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서도 원장직 수행이 적절치 않다고 봤다”고 말했다. 최 전 원장이 보수진영 대선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올해 초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 중립성을 사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 전 원장은 대권 도전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차차 말씀드리겠다”며 가능성을 한껏 열어놨다.

국민의힘은 최 전 원장을 영입해 당내 대선후보 경쟁의 판을 키우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최 원장은 충분히 저희와 공존할 수 있는 분”이라고 환영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 그 이후는 '최재형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학계에선 최 전 원장의 중도 사퇴와 정치 참여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종수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28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감사원은 정치적 중립성과 직무 독립성이 가장 먼저 강조되는 기관이라 기관장이 임기를 마치지 않고 정치로 직행하는 것은 기관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명백히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선택 고려대 로스쿨 교수 역시 “감사원장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비판이 나오는 건 정당하다”고 말했다.

최 전 원장은 감사원의 존재 이유도 흔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결정 관련 감사를 비롯해 최 전 원장 임기 중에 진행된 정책 감사 결과의 객관성 여부가 당장 도마에 오를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헌법학자는 “최 전 원장이 정치 행보를 하면, 감사원이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투명성·형평성이 정치적 공세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수 교수도 “최 전 원장 같은 사례가 반복되면, 정권이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 같은 자리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주는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감사원의 공직사회 감시·감독 기능이 약화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이는 "효율적인 공직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감사원 홈페이지)는 최 전 원장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최 전 원장이 대선행 시기를 미룬 것은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한 야권 관계자는 “최 원장은 여론을 들으면서 정치를 하기 위한 명분을 충분히 다질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이 마냥 시기를 잴 순 없는 상황이다. 판사 출신으로 현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그가 정치 참여 선언이나 국민의힘 입당을 서두르지 않으면, 어느 새 '잊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김현빈 기자
박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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