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난리 통에도 꺼내온, 할머니에겐 그 약이 전부였다

입력
2021.07.06 17:00
25면

<19> 이효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시골 중소규모 정신병원의 봉직의다. 이곳에 내려와 자리를 잡은 지 올해로 12년째. 이곳의 하루하루는 도심지 큰 대학병원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의사들이나 환자들이나 호흡이 길고 조금은 느리다고 할까. 주로 만성 조현병으로 입원한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다 보니 그런 상황은 좀 더 두드러진다. 입원 환자 진료가 주된 업무라 외래 환자는 많지 않다. 내가 외래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증세가 호전되어 통원 치료 중인 조현병 환자들이거나, 인근 노인 요양원에서 오는 치매 환자들, 그리고 몇 안 되는 동네의 신경증 환자들이다.

가벼운 불안과 불면으로 통원 치료 중인 박 할머니도 그런 분들 중 하나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건강해서 병원에도 혼자 오시고 사부작사부작 일도 다니신다. 나름 치료가 잘 되어 이젠 남은 증상도 거의 없다. 사실 약도 최저 용량이라 이제는 약을 끊어보자고 몇 번이나 권유했는데도 약 없으면 맘이 좋지 않다며 굳이 오신다.

할머니가 오시면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으로 진료를 시작한다. 그날도 나는 무심히 물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만나온 할머니에게 큰 의미 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돌아오는 대답도 늘상 비슷하다. 보통은 할머니 역시 무심히 별일은요, 할머니한테 뭔 일이 있겠어요, 늘 이 정도로 대답을 하셨는데 그날은 달랐다.

"사실, 뭔 일이 있었어요. 이번 장마 때 산사태가 나서 집으로 들이쳐서, 벽이 무너지고 소나무가 안방까지 들어오고, 아유 말도 못해요. 물이 들어차서 냉장고고 테레비고 다 망가지고요. 며느리들이 시집올 때 해온 이불, 아까워서 덮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거, 그거까지 다 망가졌어요."

할머니는 속상한 듯 피해 상황을 계속 설명하셨다.

"다행히 내가 일 나갔을 때 그 난리가 나서 다친 데는 없어요. 옆집 할아버지는 산사태 났을 때 집에 있다가 무릎이랑 다 부러졌대요. 일하다가 소식 듣고 집에 달려왔더니 허벅지까지 물이 차더라고요. 우리 손자가 와서, 그 물 속에 들어가서 가족 사진하고 약만 겨우 가지고 나왔어요. 잘 보이라고 테레비 위에 뒀거든요. 문갑에 넣어 뒀으면 다 못쓰게 됐을 거예요."

"아이고 할머니 약 그게 뭐라고. 물에 젖어서 못쓰게 되면 병원에서 다시 드려요. 물론 이중 처방이긴 한데, 제가 사유를 컴퓨터에 쓰면 다시 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안되지만, 만약 또 그런 일 생기면 절대로 약 꺼낸다고 물구덩이에 들어가시면 안돼요. 제가 다시 드리면 되는데."

"그래도 어디 그래요. 그 약 덕에 내가 맘 편히 사는데."

할머니의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약간 멍해졌다. 진료실 컴퓨터 모니터 창에 뜬 할머니의 차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증세 호전되었고 투약 중단 권유했으나 심리적 의존 있어 지속적인 처방 원함.’

참 무정하게도 적었구나. 이렇게 소중한 건데. 심리적 의존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내가 무심히 주는 약, 그 약이 할머니한테는 이렇게 소중했구나. 그 물바다 난리법석 가운데에서 할머니는 손자에게 부탁했겠구나. 너희들 사진하고, 내 약하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꺼내 와줘.

외래 진료를 마치고 병동에 올라가 입원 중인 조현병 환자와 면담하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성 정신병원 봉직의 생활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호수를 바라보는 일 같기도 하다. 가끔은 풍랑이 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잔잔한 호수. 혹자는 이야기한다. 조현병 환자의 3분의 1은 아무리 치료를 잘 받아도 결국 만성화의 길을 걷게 된다고. 3분의 1까지는 몰라도, 임상 실제에서는 아무리 신약을 쓰고 상담과 여러가지 보조 치료를 해도 환청과 망상이 호전되지 않는 조현병 환자들이 있다. 우리 병원 입원 환자들 중 일부도 대학병원과 시내 정신병원을 거치며 그런 과정을 겪은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보며, 가끔 고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를 떠올린다. 주변의 어떤 변화에도 반응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작은 배. 조현병이 만성화되어 음성 증상이 짙어지면, 환자는 때론 주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 철수하여 세상 어떤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환자들과 함께 있다 보면, 그래서 약물을 들고 갖은 노력을 다 해봐야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허무감을 몇 번 느끼다 보면, 마음엔 못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 그냥, 너무 애쓰지 말자. 어차피 그냥 반복해서 처방하나, 책과 논문 찾아가며 별 노력을 해보나, 그냥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일 뿐이잖아.'

하지만 그런 생각 중에도, 가끔 진료실에서 그 할머니 같은 분을 만나면, 선방에서 졸다가 주지 스님의 죽비를 어깨에 맞은 선승처럼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나태해지지 말아야지. 잘 처방해야지. 약이란 거, 이렇게 소중한데. 물바다 아수라장 속에서 소중한 가족사진과 함께 꼭 꺼내 와야 할 정도로, 누군가에겐.

백암정신병원 진료원장

백암정신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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