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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조정하자 고소인이 '죄인'됐다... 접수는 막히고, 수사는 깜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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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건가요."
"선생님, 여긴 서울중앙지검이고요. 지금 고소하려는 사건 사기 금액이 5억 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해야 해요. 댁 근처 경찰서로 가세요."
"아니, 경찰서에서 안 받아주니까 왔죠. 검찰은 받아줄까 싶어서 왔다니까요."
"저희한테 내도 경찰로 다시 보내게 돼 있어요. 다시 한번 경찰서로 가보세요."
택시기사 장모(71)씨는 지난 16일 서울중앙지검 1층 고소·고발 전담관실 창구 직원과 이처럼 소득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는 맥없이 돌아섰다. 평생 택시 운전하면서 남한테 눈치 보고 살지 않았던 그는 친척에게 8,000만 원을 사기당하자 고민 끝에 수사기관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소장 하나 제출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장씨는 검찰에 오기 일주일 전 서울지역 한 경찰서를 먼저 찾아갔다. 수사관이 '친척 분이 연락은 하느냐' '계속 갚겠다고는 하느냐' 물어보길래, 장씨는 "아직까지 연락은 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수사관의 답변은 장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친·인척 관계에서 돈 안 갚는 정도로는 사기가 성립하기 어렵다. 고소장 접수하긴 어렵겠다."
장씨는 "친척이 애초에 돈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는데 '한 달 뒤에 갚겠다'며 빌려간 게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기냐. 검찰은 다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법이 바뀌었다고 다시 경찰로 가라고 하니 답답할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이 들어서 운전 좀 그만할까 싶었는데 8,000만 원 다시 통장에 채우려면 2, 3년은 꼬박 일해야 할 판"이라며 "수사 안 하려고 법을 바꾼 것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6월 21일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검찰·경찰로 하여금 국민 안전과 인권을 보호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전보다 질 좋은 수사 서비스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70년 만의 형사사법시스템 개혁'을 대체로 환영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라 검찰은 6대 중대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 범죄)만 수사할 수 있게 됐고, 경찰은 '1차 수사종결권'을 손에 쥐게 됐다.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는 대폭 줄어들었고, 경찰은 검찰 개입 없이 자체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났는데도 질 좋은 수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정부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신속하고 잡음 없이 가해자가 처벌받고 범죄 피해가 회복될 줄 알았지만, 수사 진행은커녕 고소장 하나 접수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사건 처리 기간은 법이 바뀌기 전보다 훨씬 길어졌고, 수사 절차와 관련한 정보도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법 개정 이후에도 검찰과 경찰의 대립이 지속되는 사이, "내 억울한 사건을 누가 어떻게 해결해주느냐"는 물음에는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새로운 형사사법시스템이 애초에 국민들을 위한 게 아니라, 권한 다툼의 산물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경찰서 민원실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고소장 내는 것부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진입장벽만 높아졌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예전보다 훨씬 품이 많이 들고 수사기관 요구사항도 많아져, 검찰과 경찰 민원실만 드나들다 제풀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찰은 '죄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건'이라며 고소장 접수 단계에서부터 선을 긋는 태도가 부쩍 늘었다. 경찰에게 고소장을 반려할 권한이 법적으로 부여된 게 아닌데도, 경찰이 임의로 사건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1차 수사 종결권을 갖기 전까지만 해도, 경찰은 고소 사건을 수사한 뒤 사건을 무조건 검찰에 넘겨야 했다. 경찰이 1차적으로 혐의가 인정되고(기소의견), 안 되고(불기소의견)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지만, 최종 판단과 책임은 검찰 몫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경찰이 사건을 자체 종결할 수 있게 돼, '혐의가 인정 안 된다'는 판단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택시기사 장씨의 경우처럼 불송치 결정 가능성이 커서 '조사에 헛힘만 쓰게 될' 사건으로 판단되면 아예 접수조차 받지 않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수사권 조정 이후 고소인에게 수사에 준하는 증거수집을 요구한 뒤 "미흡하다"는 이유로 고소장을 반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단계 사기를 당해 경찰서를 찾은 박모(36)씨는 "상대방에게 금융거래 내용을 받아보는 게 먼저"라는 경찰관 말을 듣고, 끝내 고소장을 내지 못했다. 박씨는 "내가 다단계 업체에 지불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인데, 오히려 고소인에게 떠넘기면 수사기관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소액사건 형사사건 변호를 주로 맡아온 한 변호사는 "작년까지만 해도 경찰이든 검찰이든 웬만하면 고소장은 다 받아줬지만, 이제는 수사기관 문턱을 넘을 때부터 장벽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고소장을 접수한 뒤에도 답답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내리면서 검찰에 기록을 넘겼는데도, 고소인에게 아무런 통지를 하지 않는 일까지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법이 개정되면서 경찰은 고소인에게 송치·불송치 여부를 결정 후 7일 이내에 통보해줘야 한다. 그리고 불송치했을 경우 불송치 결정서도 고소인에게 교부해야 한다.
의사 김모(41)씨는 지난 2월 지인에게 '주식 사기'를 당해 경찰을 찾았다. 지인이 "주식 전문가에게 투자받을 생각이 없냐"며 4,000만 원을 받아 갔는데, 알고 보니 다른 증권사 계좌에 넣어둔 채 제대로 투자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씨는 경찰에서 고소인 조사를 받았지만 두 달 동안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김씨에게 연락한 건 경찰이 아니라 검찰이었다. 검찰은 지난 4월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하기로 했다"고 김씨에게 알려줬다. 경찰은 사건을 송치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검찰에서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봤더니 피의자의 다른 증권사 계좌를 들여다보지 않는 등 경찰 수사가 미흡했다는 이유였다. 경찰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놓고도, 고소인인 김씨에겐 전화나 문자, 공문 등 어떤 형식으로든 연락하지 않았다. 김씨는 "경찰에서 혐의가 인정 안 된다고 봤다는 얘기를 검찰에서 들으니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검찰에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이고, 검찰은 그래서 어떤 기록을 검토했다는 건지, 검찰이 재수사를 요구하면 내 사건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의 신경전에 피해를 보는 고소인도 적지 않다. 검찰이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 담당 경찰에 연락했다가 오히려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IT 회사 직원 강모(44)씨는 최근 "검찰에서 보완수사를 요구했다고 들었다"며 담당 경찰에 전화했다가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완수사할 내용을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송치한 사건을 검찰이 왜 돌려보내는지 모르겠다"며 고소인을 상대로 불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경찰은 "검찰에서 수사하면 될 것을 왜 예전처럼 지휘를 하느냐"는 말만 반복했다. 답답한 마음에 강씨는 곧바로 검찰에 다시 연락했지만 "공문을 보냈으니 경찰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답변만 들었다.
강씨는 검찰과 경찰 간 의사소통이 없다는 점에 놀랐다. 강씨는 "경찰로 사건을 돌려보낼 때, 검찰에서 그 이유에 대해 구두로 자세히 설명하는 줄 알았는데, '증거조사 부족'을 이유로 공문으로 보완수사를 요구한 게 전부였다"며 "경찰 수사의 미흡한 점을 정확히 지적해준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검찰과 경찰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담당 경찰은 강씨에게 "수사권 조정 이후엔 검찰이 책임감을 갖고 사건을 끌고 가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경찰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에선 "바뀐 제도의 취지가 경찰이 책임 수사를 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보완수사도 기본적으로 경찰 몫"이라는 입장이다.
강씨는 검찰과 경찰의 신경전에 답답하기만 하다. 강씨는 "억울해서 수사기관 문을 두드린 것인데, 오히려 양쪽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만 쌓인다"고 하소연했다.
검찰이 경찰에 재수사 요청을 한 상황에서, 검찰로부터 "가해자와 합의할 의향이 있느냐"고 연락받은 고소인도 있다. 대기업을 다니는 정모(39)씨는 가상화폐 투자를 대신해 준다고 돈을 가져간 지인으로부터 손해를 보게 되자 두 달 전 경찰을 찾았다. 정씨는 검찰에서 합의를 제안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경찰의 재수사 결과는 어떠한지, 지인은 혐의를 인정했는지, 경찰과 검찰 어느 쪽에서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정씨는 결국 검찰에 연락해 경찰이 재수사 후 어떻게 판단했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경찰이 다시 수사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검찰에서 이후 지인을 한 차례 불러 조사했고, 지인이 일부 혐의를 인정하면서 정씨와 합의를 원하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정씨는 그러나 경찰이 불송치에서 송치로 의견을 바꾼 이유와 지인이 혐의를 인정한 과정에 대해선 여전히 아는 게 없다.
정씨는 사건 처리 결과를 설명해주는 걸 수사기관들이 서비스 제공이 아니라 특혜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피해자인데도 불송치, 재수사, 송치 과정을 거치면서 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개략적이라도 설명해주는 곳이 없었다"며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수사기관이 국민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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