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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한국군 위안부'... 국가는 70년간 외면하고 있다

입력
2021.06.24 14:00
수정
2021.06.24 14:1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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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 최초 연구 김귀옥 교수]
2002년 논문 발표해 군 위안부 동원 드러내
군 자료에도 명시… 서울·강릉 전선에만 128명?
성매매 오해, 왜곡된 성의식에 피해 증언 전무
"유엔 안보리 인정한 범죄… 국가가 책임져야"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 부근에서 군인들이 불타는 부대 시설을 가로지르며 순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 부근에서 군인들이 불타는 부대 시설을 가로지르며 순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6·25전쟁 때도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19년 전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김귀옥(59) 한성대 교수의 2002년 논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6·25전쟁 71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한국군 위안부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와는 또 다른 차원의 억압과 편견에 눌려 피해 증언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김 교수는 2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와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군 자료에도 기록된 '위안부'

1951년 4월 부산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북한?중국 포로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1년 4월 부산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북한?중국 포로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6·25전쟁 중 한국군 위안부가 동원된 시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1951년 가을쯤 전쟁이 소강상태를 맞아 전선이 현재 휴전선 부근으로 고착됐을 때 군인 관리를 명목으로 위안부가 도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이다. 다만 위안부 운영 사실은 여러 사료로 입증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예컨대 1952년 12월 30일 자 동아일보엔 '한국군을 위한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실렸고, 이듬해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1월 16일 자 경향신문엔 '육군회관 4개에 걸쳐 한국군 위안소를 증설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군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 교수는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에서 전쟁 중 후방 지원 업무 명목으로 '특수위안대'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이 책엔 위안부를 '소대'로 편제해 운영한 기록 일부가 남아있는데, 이를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에만 128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김 교수는 "최근 강원 고성·양양 등에서 위안부가 동원된 흔적이 추가로 발견됐다"며 "공식적 운영뿐 아니라 각 부대가 자체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전 장교나 포로가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한 기록도 적지 않다. 김 교수가 1996년 11월 강원 속초에서 인터뷰한 월남민은 한국군에 민간인 포로로 잡혔을 때 위안부를 봤다고 회고했다. 그는 "군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 이북 말씨를 안 썼고 군인들을 위문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채명신?차규헌?김희오 장군의 회고록에도 국군을 위한 위안부가 배정됐다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성매매 오해?민족주의… 피해 증언 어려워

1951년 4월 부산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북한?중국 포로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1년 4월 부산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북한?중국 포로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을 전쟁에 성노예로 동원한 반인륜 행위라는 점에서, 한국군 위안부는 절로 일본군 위안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둘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 중엔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도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2명의 피해자를 만났지만, 이들은 존재를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피해 사실 진술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당시 국권을 침탈한 일본을 가해자로 지목할 수 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민족으로 묶여 있어 피해를 증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만났던 여성은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피해 직전 군인의 호의로 풀려난 후 그와 결혼했다고 진술했다. 실제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중 상당수는 이런 '강제 결혼'을 통해 피해 사실이 없던 일처럼 돼버렸다고 한다.

민간에서 성매매 여성을 모집해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주장도 피해자를 숨게 만든다. 김 교수는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위안부가 공개 모집 형태로 운영됐다는 증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피해 여성들이 전방 지역으로 '강제 출장'을 갔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조직적 통제 정황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는 당시 육군본부 기획에 따라 제도화돼 국가 체제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성 중심적 성 인식이 위안부 문제 조명을 막는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전시 상황이던 당시엔 군인의 성욕이 억눌린 상태이므로 민간인 대상 성폭력을 막기 위해서라도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전후에도 피해 당사자들이 나설 수 없는 환경이었고, 위안부 존재를 증언한 일부 남성들 역시 피해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을 드러냈을 뿐 이를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70년간 함구… "국가가 책임져야"

김귀옥 한성대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귀옥 한성대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 교수는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역사를 숨기려 한다는 걸 여러 번 체감했다고 한다. 2002년 논문이 발표된 후 국방부는 당시 김 교수가 소속된 학교 측에 연락해 연구 자제를 요구하는 등 외압을 가했다. 위안부 존재를 입증할 결정적 기록물인 '후방전사'는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2005~2010년 활동한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6·25전쟁 당시 벌어진 국가 폭력 사건을 여럿 조사했지만 정작 한국군 위안부는 다루지 않았다. 김 교수는 "지난해 청와대에서 한국군 위안부 진상 규명에 관심을 보이며 연락을 해왔지만 그뿐, 실제 노력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가 엄연한 국가적 범죄이며 국제적 책임 역시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000년 만장일치로 채택한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결의안'에 따르면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국가가 진상규명?사과?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며 "한국도 이 결의안에 서명한 국가이자 가해 주체로서 한국군 위안부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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