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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그냥 내 아이 같았죠" 그렇게 엄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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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제2회 기획취재물 공모전 당선작을 3주에 걸쳐 매주 3회 게재합니다. 이번주는 일반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장애아동 입양 불모지'로 해외입양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장애아동 입양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봅니다.
열악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모든 무연고 장애아동이 국내에서 가정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장애아 입양 가정 세 곳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아 21명의 아버지가 있다. 서울 관악구에서 12년째 베이비 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68) 목사다. 아이들과 입양 및 후견인 등으로 연을 맺었다. 4월 14일 서울 금천구 주사랑공동체 교회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의 입양 자녀는 9명이다. 모두 다운증후군이나 뇌성마비 등 장애를 가졌다.
어떻게 입양을 했을까. 그는 15년 전 전화를 회상했다. 열네 살 여성이 낳은 무뇌증 아기가 얼마 못 살 것 같으니 잠깐이라도 맡아 달라는 사회복지사의 부탁이었다. 몸무게 1.8㎏의 ‘한나’였다. 품에 안겨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200㎖의 우유를 먹이는 데 2시간이 걸렸다.
불면 꺼질까 싶어 종일 안고 지냈던 한나는 6년을 살고 떠났다. 한나를 보내며 이 목사는 장애아의 법적 부모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당시 보호하던 15명의 장애아를 모두 입양하려 했다. 그러나 법적 절차를 거치며 9명만 받아들여졌다. 나머지는 후견인이 되거나 가정 위탁으로 돌보는 중이다. 이 목사는 “입양 여부를 떠나 여기 아이들은 다 내 자녀”라고 강조했다.
구두 디자이너 김리온(45)씨는 뇌병변 1급 장애가 있는 딸 지윤이(가명·9)와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평소 봉사를 다니던 경기도의 장애영아원에서 생후 6개월의 지윤이를 만난 날 김씨는 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봉사를 마친 김씨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첫눈에 그냥 너무 내 아이 같았다”고 했다. 지윤이를 보기 위해 영아원에 재방문했고 일대일 후원도 신청했다. 그러고서도 감정이 해소되지 않자 입양을 결심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30분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엄마!” 하며 지윤이가 뛰어 들어왔다. 아홉 살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발음도 분명치는 않았지만 한눈에 웃음이 많고 밝은 아이라는 김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윤이의 발달이 느려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걸음마를 늦게 떼도 결국 지금 걷고 있으면 상관없지 않나. 언어발달에 지연이 있지만 결국 나중에는 비슷해질 거라 생각한다.” 지윤이는 현재 언어 및 재활치료를 받으며 홈스쿨링 중이다.
처음부터 장애아를 입양하기도 하지만 입양 후에 장애를 발견한 경우도 있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이창미(44)씨는 최가연·가은(16) 쌍둥이 자매의 엄마다. 2010년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당시 다섯 살이었던 쌍둥이의 부모가 됐다. 만 세 살을 넘긴 아동을 입양하는 연장아 입양이었다.
이씨는 20대 초반 전신성 경화증이라는 희소병을 앓았다.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지만 장기간의 투약으로 아이를 갖기 어려웠다. 신생아를 입양할 계획이었지만 과거 병력 때문에 이마저 거절당했다. 연장아 입양을 고민하던 중 쌍둥이를 만났다.
둘째 가은이의 장애 사실은 우연히 알게 됐다. 남편의 필리핀 신학연수를 따라가고자 보험을 가입했는데 가은이가 거절당했다. 과거 병력이 조회된다는 이유였다. 보험사는 입원 치료 기록이 있다고 했다. 입양기관으로부터 들은 바도 없었기에 무척 놀랐다.
이씨는 쌍둥이가 태어난 병원에 찾아갔다. 가은이에게 오른쪽 폐 기흉과 뇌실 출혈, 수두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른쪽 뇌가 덜 발달하고 왼쪽 뇌실에 물이 차는 증상도 있었다. 가은이는 뇌병변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이들이 원래도 또래에 비해 발달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특히 가은이가 뭘 흘리거나 잘 넘어지는 등 실수가 잦았다. 그래서 얘는 더 늦나 보다 생각했지 장애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이후 이씨는 가은이를 2년간 매일 병원에 데리고 다녔다. 원주기독병원(현 원주세브란스), 아동발달연구소 등 아침마다 치료를 받는 일이 일상이었다. 치료비 부담도 컸다. 다행히 병원에서 일부 지원을 받거나 정부 바우처로 부담을 조금 덜었다.
김씨가 처음 입양 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서는 ‘그렇게 바쁜데 애를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등 부정적 의견이 많았다.
입양 후에도 편견과 마주해야 했다. 대부분 입양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으로 ‘대단하다’는 말이 그렇다.
“좋은 의도겠지만 유독 입양에만 대단하다는 반응이 많다. 흔하지 않기에 선한 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를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냥 부모 자식 관계지 봉사가 아니다.”
입양뿐만이 아니다. 김씨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더 크다고 말한다. 유치원 등록 과정에서 장애아라는 사실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등의 경험을 심심치 않게 겪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느낄 때마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살아갈 미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편견에 속앓이도 하지만 장애아 입양가정은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터뷰에 응한 세 부모 모두 아이 자랑을 할 때는 자연스레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목사는 아이들이 집 앞 건널목에서 “아빠!” 하고 부를 때 가장 행복하다. 아이들이 이 목사를 부르면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다. “머리가 하얀 사람한테 아빠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애 한 번 쳐다보고 나 한 번 쳐다본다.”
이 목사가 키우는 자녀 21명 중 9명은 10대 청소년이다. 뇌 갈림증이 있는 민준이(가명·16)는 키가 182㎝다. 잘생기고 키가 커서 모델을 꿈꾼다. 오른손이 없는 윤재(가명·16)는 태권도 유망주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도 3번 땄다.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훈련받고 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이 목사 품에 안긴 지훈이(가명·20)는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 이 목사는 “늘 울어서 안고 키운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컸는지 뿌듯하다”고 말했다.
쌍둥이 엄마 이씨는 가은이가 처음 ‘엄마’라고 적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일곱 살 때까지 글자를 못 쓰던 가은이가 쓴 첫 단어였다.
“보통은 다섯 살만 돼도 자기 이름을 쓰지만 가은이는 못 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수첩에 엄마라고 적어서 깜짝 놀랐다. 글자가 좌우반전이기는 했다.” 이씨는 그 수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장애아 입양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어떤 말을 해줄까. 이 목사는 장애 아이가 훨씬 행복하다고 말한다.
“보통은 자라면서 부모와 멀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장애아동은 커서도 부모에게 스스럼없이 안긴다. 장애아를 입양하려면 망설임 없이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육아의 고충을 생각하면 함부로 권하기는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입양을 고민한다면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부모가 생긴다는 건 곧 이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도 생긴다는 의미다. 입양으로 가정을 이루는 건 축복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만약 장애 사실을 입양 전에 알았으면 솔직히 망설였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건 가정이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라며 “장애 아이도 값지게 잘 돌보고 키우면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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