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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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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엄마, 나는 소방관 될 거야! 애앵하고 구해 줄 거야.” “정말? 아주 멋지다.” 어눌한 다짐에 맞장구를 치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물색없는 기쁨과 슬픔이 닥친 탓이다. 세상에 난 지 겨우 3년 반, 아는 말보다 모르는 말이 많다. 그런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소방차와 소방관을 동경한다. 푹 빠진다. 보고 있노라면 자주 인간다움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물론 아이들은 모른다. 어른의 세계에서 재난과 구조가 어떤 의미인지. 타인을 위해 불길 속으로, 어둠을 향해 달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작가 김훈이 한결같이 이어가는 이런 소방관 예찬이 얼마나 정확히 그 숭고를 일깨우는지. “다가오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바다의 기별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中)
그런데도 삐뚤빼뚤 색칠한 소방차를 보고 또 보고, 종일 장난감 소방차의 사다리를 꼭 쥔 채 “구해줄게”를 외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약간의 안도감, 그걸 희석시켜버린 이들에 대한 씁쓸함, 나 자신에 대한 반성 등으로 생각이 번진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꿈은 어쩐지 자세까지 고쳐 앉게 한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소방관의 마지막 모습에 세상이 다시 숙연하다. 고 김동식(52) 구조대장은 20일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순직했다. 붉은 화염을 토하는 건물 속. 맨 뒤에서 동료들 탈출부터 도왔지만 거센 화염에 휩싸여 실종됐다. 47시간 만에 발견된 그의 모습에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희생이다.
성난 불길과의 싸움이 거듭되던 시간, 꽤 난데없는 소식이 알려졌다.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의 국내법인 의장직 및 등기이사 사임 발표다. “글로벌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차디찬 이유를 읽고 또 읽었다. 5시간 전 발생한 화재에 대한 냉담한 침묵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쿠팡 측은 억울한 표정이다. 일찌감치 결정된 사안이며, 다른 경영진이 현장에서 수습 중이었다는 설명도 나왔다. 그래도 중요한 건 변하지 않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말의 자리가 비어있었다는 것.
열악한 물류센터 노동환경에 대한 해명, 사고에 대한 유감, 수습 의지, 초기 작동하지 않은 스프링클러 등 내부 책임 문제, 근본 개선책 마련의 각오, 소방공무원 노고에 대한 감사, 무사귀환에 대한 염원 등은 온데간데 없었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주는 메시지가 컸다. 중대재해처벌법 회피용이란 의심도 쏟아졌다.
이견이 분분하지만 ‘쿠팡 탈퇴’가 이어진다. 새롭지만 낡았고 체계적이되 무책임한 기업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선언들이다. 꽤 절박한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이번 사태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인류가 윤리기업, 책임자본주의 같은 말을 기본 요구로 만들어온 방법이니 말이다.
다시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뿌연 연기 속에서도 확인하고야 마는 존재다. 누가 때론 목숨까지 바쳐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는지. 누가 책임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지. 그리곤 함께 다시 책임을 묻는 ‘선한 오지랖’을 부리고야 마는 존재다. 이런 게 때론 괴물 같게만 보이는 인간의 본성인 것일까. 이런 게 이어지는 비극과 오열 속에서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결국엔 무책임이 횡행한 시대를 차근차근 끝장내리라는 미약한 신호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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