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분광학과 광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고재현 교수가 일상생활의 다양한 현상과 과학계의 최신 발견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조망합니다.
지난 5월 열린 유엔총회에선 2022년이 ‘국제 유리의 해(International Year of Glass)’로 선포됐다. 유엔은 그간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해를 지정, 기념해 왔고 필자가 기억하는 인상적인 행사로는 2005년 ‘물리의 해’, 2015년 ‘빛과 광기술의 해’, 2019년 ‘화학 원소 주기율표의 해’ 등이 있다. 과학기술의 특정 분야를 기리는 이런 행사는 보통 중요한 과학사적 이정표를 기념하며 제정된다. 이런 면에서 특정 물질에 불과한 유리를 기념하는 해를 유엔이 선포했다는 것은 다소 특이해 보인다.
그러나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처럼 인류의 도구 제작에 쓰인 재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시기를 구분한 관점으로 보자면 오늘날을 ‘유리의 시대’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리는 인류 문명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건축물의 필수 자재인 유리창,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디스플레이 기기의 화면, 각종 전등과 유리 식기,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의 과학기기들, 재생에너지의 대표주자인 태양전지 등 몇 가지 예만 봐도 유리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유리가 다른 물질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유리의 어떤 특성이 유리를 그처럼 만능 재주꾼, 변신의 귀재로 만드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다. 오늘 살펴볼 분야는 바로 유리의 물리학이다. 유리의 특성과 함께 유리가 현대 문명을 어떻게 혁신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물질의 상태와 이상한 유리
중등과학 과목에선 물질을 보통 고체, 액체, 기체로 분류한다. 딱딱한 고체를 이루는 원자나 분자는 고체 내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정렬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결정(crystal)이라 부른다. 반면에 액체와 기체 내 원자와 분자는 제자리에 붙잡혀 있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액체를 이루는 원자·분자들의 거리는 매우 가까운 데 반해 기체 내 이들 사이의 거리는 상대적으로 멀다. 액체는 일정한 부피를 가지며 자유롭게 흐르는 반면, 기체의 부피는 자신이 들어가 있는 용기의 크기로 결정된다. 비유하자면, 운동장에서 간격을 유지하며 정렬한 군인들의 상태가 고체, 운동장이란 장소에 국한되어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경우가 액체,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고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드론의 무리를 기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에는 이런 도식적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물질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별이나 번개를 이루는 플라스마(plasma)다. 흔히 물질의 제4의 상태라 일컫는 플라스마에는 중성 원자 대신 양과 음의 전하를 띠는 입자들(이온이나 전자들)이 동일한 비중으로 들어 있다. 따라서 멀리서 보면 전기적으로 중성이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한다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전하들을 볼 수 있다. 위치는 제멋대로지만 방향이 정렬되어 있는 물질의 상태도 있다. 바로 액정 패널 속 액정이다. 액정을 이루는 길쭉한 막대기형 분자들은 방향은 유지한 상태에서 위치를 바꾸며 흘러다닐 수 있는데 이를 액정 상이라 한다. 이를 디스플레이에 활용한 제품이 액정표시장치(LCD)다.
유리는 이들과 어떻게 다를까? 창유리를 만지면 고체와 다를 바 없이 매우 딱딱하다. 그런데 유리의 내부를 확대해 보면 놀랍게도 일반적인 고체, 즉 결정의 고유한 특징인 원자 배열의 규칙성이 없다. 가령 얼음 속 물분자들은 규칙적인 간격을 유지하며 3차원적으로 결합해 있다. 그런데 창유리를 이루는 원자들은 규칙성 없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흡사 액체 속에서 복잡하게 움직이는 원자·분자들의 순간 사진을 찍어 고정시킨 것처럼 말이다. 액체처럼 제멋대로 배열된 원자들의 네트워크가 고체와 같은 강도를 가진 이상한 물질이 바로 유리인 것이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유리 레시피
인류는 언제부터 유리를 이용하게 되었을까? 유리는 보통 녹아 있는 액체를 급속히 냉각시켜 얻을 수 있다. 온도를 낮추면 물이 얼음으로 변하듯이 일반적인 액체는 냉각시키면 결정으로 바뀐다. 그런데 급랭을 하면 원자·분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 결정으로 변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없이 무질서한 배치 그대로 굳어 버린다. 자연에서는 화산 활동이나 번개, 소행성 충돌 등으로 광물이 녹았다 굳어져 형성된 흑요석이나 섬전암과 같은 천연 유리가 있고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이들을 이용해 왔다.
인류가 최초로 유리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시기와 장소는 대략 기원전 2,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추정된다. 인류사에 주로 사용된 유리는 모래의 주요 성분인 이산화규소(SiO₂)에 식물의 재나 탄산나트륨 계열 광물을 넣어 녹는점을 낮춰 가공한 것이다. 불순물이나 첨가제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는 유리는 과거에는 보석과 같은 지위를 갖기도 했고 중세에는 각 성당과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쓰이는 등 활용 영역을 넓혀 왔다.
그러나 유리의 활용성이 가장 돋보였는 분야 중 하나는 과학이었다. 제조 기술의 진보로 투명한 유리가 탄생하자 이를 가공해 망원경이나 렌즈 같은 광학 기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레벤후크의 현미경이 미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면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인류에게 우주의 비밀을 드러낸 새로운 눈이었다. 뉴턴이 손에 들었던 유리 프리즘이 빛의 본질을 밝히는 전기를 마련했다면 곧 우주를 향해 발사될 차세대 제임스 웹 망원경의 거대한 반사경은 초기 우주의 미약한 빛을 잡아낼 가장 강력한 타임머신이 될 것이다.
기술 문명의 혁신을 이끄는 유리
산업혁명과 그 이후 대량 생산 기술이 확보되면서 유리와 유리 제품은 오늘날 너무나 흔한 물질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여전히 과학과 기술의 혁신을 이끄는 핵심 아이템 중 하나다. 오늘날 전 세계를 정보 네트워크로 연결한 일등 공신은 유리에 기반한 광통신과 디스플레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유리는 반도체와 더불어 IT기술 문명의 핵심 뼈대라 할 만하다. 게다가 더욱 강한 유리, 마음껏 휘거나 접을 수 있는 유리, 스스로 청소를 하거나 조건에 따라 색을 바꾸는 스마트 유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유리의 새로운 전성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오랜 역사 속에서도 왜 유리라는 물질이 만들어지는지 과학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현재도 액체가 유리로 변하는 과정을 다양한 방법들로 조사하며 정교한 이론적 체계를 만들고 있으나 유리 상전이 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필립 앤더슨은 20세기 말 “고체 상태 이론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아마도 유리와 유리 상전이의 본성에 대한 이론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유리 기술은 먼 과거에는 통상로를 통해 전달되던 귀한 교역 품목이었다. 신라의 고분 중 하나인 황남대총에서는 서역에서 전래한 유리병 등 다양한 유리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그리스의 오이노코에 병의 일종인 봉황 모양 유리병은 은은한 색감과 화려한 병 모양으로 인해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유물들은 당시 유라시아 동서를 연결하는 문물 교역의 증거이자 왕을 포함한 귀족들이 유리를 매우 귀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원 전후와 삼국시대의 유리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오색영롱: 유리, 빛깔을 벗고 투명을 입다'라는 주제로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남분 유리병을 포함, 다양한 유리잔과 유리구슬이 발산하는 아름다운 색을 감상하던 필자의 머릿속에는 머나먼 과거에 귀한 유리기를 싣고 실크로드를 따라가던 상인 대열과 삼국시대 다양한 유리 제품을 생산하던 가마터에 대한 상상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졌다. 새롭게 개화하는 유리의 시대, 이를 기념하는 2022년 국제 유리의 해를 맞아 올여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펼쳐지는 빛과 색의 축제에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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