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아동 안락사를 말하던 시대… 세상을 바꾼 부모의 투쟁

입력
2021.06.17 16:24
수정
2021.06.17 17: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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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기에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부족한 아이가 있다면 숨을 끊어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고려해보자. 그가 살아가는 동안 그와 가족의 삶이 얼마나 망가질지 생각해보자. 우생학을 바탕으로 ‘열등한 인종’을 학살했던 나치당의 주장이 아니다. 1942년 미국정신의학협회 학술지에 실렸던 논문의 골자다. 저자는 정신장애 어린이 안락사를 옹호하면서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며 보기에도 흉측하고 기괴하며 쓸모없고 어리석으며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함을 지닌 어린이에게서 삶이란 처절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자비롭고 친절한 일이라고 믿는 바”라고 썼다. 멋대로 ‘정상인’의 기준을 정하고 타인의 행복과 생명의 가치를 판단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전 자폐인이 직면했던 세상이다.

자폐증의 역사를 추적한 미국의 언론인 존 돈반과 캐런 저커에 따르면 자폐증은 오랫동안 남들에게 감춰야 하는 질병이었다. 1940년대 중반까지는 제대로 된 진단명조차 없었다. 원인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자폐증이라는 진단은 사회적 낙인이 됐다. 자폐인은 공립학교에 다니기는커녕 비인간적인 환경의 수용시설로 보내졌고 종종 죽어서 밖으로 나왔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폐로 만든 주범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정신의학자들은 냉장고처럼 차가운 엄마,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자폐증을 일으킨다고 근거 없이 확신했다. 이러한 지옥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될 수도 있었다. 부모들이 무지한 의료계에, 불의한 사회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등 시민들이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인 2018년 4월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 촉구 전국 1박 2일 집중 결의대회'를 열고 삭발식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자폐인과 발달장애인 권익 투쟁의 최전선에는 항상 부모들이 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등 시민들이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인 2018년 4월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 촉구 전국 1박 2일 집중 결의대회'를 열고 삭발식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자폐인과 발달장애인 권익 투쟁의 최전선에는 항상 부모들이 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세상을 바꾼 아이의 탄생

변화는 아이를 시설에 보내기를 거부한 한 부부로부터 시작됐다. 메리 트리플렛, 비먼 트리플렛 부부는 1933년 9월 8일 미국 미시시피주의 소도시에서 도널드를 낳았다. 도널드는 주변과 소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행동을 극단적으로 똑같이 반복했다. 아침식사 때마다 엉터리 문장을 말하고 엄마가 따라서 말하지 않으면 격렬하게 화를 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의사들은 아이를 수용시설로 보내라는 조언 아닌 조언만 반복했다. 당대의 의사들은 정신장애가 있는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여 키우겠다는 부모들에게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지 마세요.”

부부는 잠시 그 조언을 따랐지만 금세 마음을 고쳐먹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메리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어린이 정신과 의사, 레오 카너에게 33쪽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다. 메리는 카너에게 도널드의 상태를 꾸준히 알렸고 카너는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어린이들을 연구한 끝에 결정적 특징 두 가지를 찾아냈다. ‘이 아이들은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극단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카너는 메리에게 보낸 1942년 9월 28일 자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널드와 다른 소년들의 상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자폐적 장애’로 명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폐증이 무지의 터널을 벗어나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권리를 되찾으려 싸운 부모들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사람답게 대우해달라는 요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카너의 ‘발견’ 이후에도 의학은 더디게 발전했고 ‘냉장고 엄마’ 이론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진단명은 생겼지만 의사들은 부모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직 육군 간호장교였던 루스 설리번 역시 의료계에 실망한 자폐인의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63년 아이가 자폐증 진단을 받은 이후, 루스는 뉴욕주립대학으로 달려가 자폐증과 관련이 있는 모든 책과 의학저널을 읽었다. 그리고 맹렬하게 분노했다. ‘이 사람들 지금 농담하나? 내가 자식을 거부하고 차갑게 대해서 조가 자폐아가 되었다고? 대체 과학은 어디 있는 거야? 실제로 아이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는 어디에 있는 거야?’

루스는 가만히 앉아 있는 대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자폐인 부모들은 물론, 기자와 정치인들, 연구자들까지 전화를 받았다. 수많은 보고서와 예산서, 연구, 계획, 법령, 규정, 요약서, 판결문을 읽고 수많은 회의를 끝도 없이 찾아다녔다. 설득하고 단념시키고 격려하고 회유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1965년 11월 14일 뉴저지주의 한 가정에서 열린 모임에서 전미 자폐어린이협회(NSAC)가 출범했다. 자폐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전국 조직의 탄생이었다. 용기를 얻은 부모들은 행동을 시작했다. 1971년 펜실베이니아 지체아동협회(PARC)는 아이들에게 정당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라며 주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재판 첫날, 하루 만에 승소했다. 전문가들의 포화를 견디지 못한 주 정부는 오전이 가기 전에 백기를 들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존 돈반, 캐런 저커 지음ㆍ강병철 옮김ㆍ꿈꿀자유 발행ㆍ864쪽ㆍ4만 원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존 돈반, 캐런 저커 지음ㆍ강병철 옮김ㆍ꿈꿀자유 발행ㆍ864쪽ㆍ4만 원


열등한 것이 아닌 ‘다른 것’

1980년대 이후로는 자폐증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자폐증은 생물학적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자폐증이 생각보다 다양한 인간 특성의 ‘스펙트럼’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인정받았다. 자폐증은 여러 성향의 무한한 조합으로 구성돼 있다. 카너가 발견한 것은 그 일부분일 뿐이다. 연구 결과는 자폐인과 비자폐인이라는 이분법을 무너뜨린다. 모든 인간의 정신은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연구 결과와 투쟁의 기록은 자폐인이 아닌 다양한 소수자 집단에 희망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조현병 환자부터 성소수자까지 사회가 배제한 소수자들에게 “당신들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기회를 포기하지 말고 싸우라고 독려한다. 돈반과 저커는 자폐증의 역사를 기록한 저서를 뉴저지주의 버스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으로 끝맺었다. 자폐인의 소동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남성들에게 승객들은 이렇게 외쳤다. “얘가 왜 그러냐구? 얘는 자폐인이오. 이제 당신들이 왜 그러는지 말해봐요.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가든지.”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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