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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양장 제작 거쳐 '한복 최고봉' 깨끼저고리 명장으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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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끼저고리에 홀딱 반해서 바느질하고 삽니다."
예전에 한복집과 포목점이 즐비했던 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부시장 주변은 이제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한복집이 있다. 남부시장 옆 고물자 골목에 자리한 ‘루비한복’이다.
고물자 골목은 6·25전쟁 후 이곳에서 미군 구호물품을 거래하던 이들이 '구호물자 골목'을 빨리 발음하다 보니 생겨난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 형성돼 역사가 깊은 골목이라 '오꼬시 골목' '배차장 골목' 등 이름도 여러 개다. 한때는 '한복 골목'으로 불렸는데, 많을 땐 10곳 넘는 한복집이 모여 있어 밤늦도록 골목에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였다.
60년 넘게 옷 짓기 외길 인생을 살고 있는 오정자(78) 루비한복 대표를 만나기 위해 16일 고물자 골목에 들어서자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허름하고 촌스러운 건물과 간판 속에 '루비한복'이 눈에 들어왔다. 15㎡ 남짓한 가게에 들어서자 깨끼저고리와 치마를 우아하고 기품있게 갖춰 입은 오 대표가 맞이했다.
손때 묻은 재봉틀 2대가 자리한 실내에는 고운 색깔의 옷감들이 재단대 위에 쌓여 있고 한복들이 벽에 촘촘히 걸려 있었다. '루비'는 오 대표가 한복집 개업 전 30년 가까이 양장점을 운영할 때부터 쓰던 상호다. '보석 루비처럼 옷을 예쁘게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지었다고 한다.
오 대표가 고물자 골목에 자리 잡은 것은 30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루비한복보다 훨씬 오래된 한복집이 골목에 즐비했지만, 15년 전쯤부터 상권이 쇠락하며 가게 대부분이 떠난 터라 오 대표가 뜻하지 않게 터줏대감이자 산 증인이 됐다. 이제 골목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복집은 3곳뿐이다.
오 대표의 전공은 한복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깨끼저고리다. 깨끼바느질은 옷감 안팎을 세 번 바느질하는 것으로, 모시처럼 얇은 소재에 사용하는 전통 바느질이다. 가느다란 올을 반듯반듯하게 바로잡아줘야 하기에 일반 바느질보다 섬세하고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곡선이 많은 저고리는 치마에 비해 몇 배나 어렵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모시로 지은 깨끼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아하고 멋스러운 자태에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을 줬다. 루비한복 단골 할머니는 여름이면 이 집 모시옷만 입었는데, 사람들에게 "참 예쁘다"라는 말을 듣는 게 좋아서 살 것도 없는 백화점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모시옷 입은 사람을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모시 특유의 빳빳한 감촉이 살도록 손질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보니 서서히 대중성을 잃은 것이다.
루비한복의 일감도 2000년대 이후 줄었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은 꾸준하다. 오 대표에겐 뛰어난 바느질 솜씨에 30년 양장 제작으로 체득한 보정법을 통해 옷매가 안 좋은 손님에게도 체형에 맞는 한복을 지어주는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한복은 가봉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한번에 완성하는 옷이라 모양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어깨가 올라가거나 등이 굽거나 목이 굵은 경우 재단할 때 자주 수정해요. 체형을 메모해 두고 머릿속에 입력해 놔야 손님에게 제일 잘 맞는 한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을 얻는 데 있어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오 대표의 철학이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좋은 옷을 입히겠다는 자세가 손님을 만족시켰고 루비한복을 오늘날까지 존재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오 대표는 "옷을 지을 때마다 손님 체형에 맞는지, 손님 마음에 들 수 있을지를 항상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오 대표는 완주군 고산면에서 7남매 맏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17세 때 인근 교회에서 간이 중학교 겸 양재학원을 1년 과정으로 운영하자 이곳에서 양장 기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바느질을 접했고 소질도 남달라 두각을 보였다. 전주에 있는 양재학원에서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재단사로 취직한 그는 퇴근 후 선배 언니들 가게에서 고급 재봉기술을 익히며 악착같이 실력을 키웠다.
"남 밑에서 일을 못하는 성격" 때문에 20세 때 완주군 봉동에 '루비양장점'을 개업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라 남포등 켜고 밤새워 독학해가며 옷을 만들었다. 자신감이 생기자 2년 뒤 고향인 고산으로 이전해 결혼도 하고 가게도 키웠다. 하지만 마흔 살쯤 되자 기성복 시장이 커지고 교복마저 입지 않는 시대가 닥쳤고, 남편이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해졌다. 장사라도 해야 하나 싶어 옷가게를 하는 친구를 찾아가 배우고 과일가게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단을 사러 전주에 갔던 오 대표는 포목점 쇼윈도에 걸린 깨끼저고리를 보고 귀신에 홀린 듯 꼼짝하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박았을까, 궁금했다. 당장 한복집에 취직해 깨끼바느질을 배웠다. "한복 기본기는 알고 있었지만 깨끼옷은 곱게 만들려면 연습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깨끼저고리에 반해서 한복집을 하게 되었지요."
막내 교육 문제도 있어서 1989년 전주에 둥지를 틀었다. 처음엔 가게를 내지 않고 집에서 단골이나 포목상 주문을 받아 한복을 짓다가 포목상 주인 권유로 한복집을 차렸다. 당시에는 결혼식이나 회갑잔치가 있으면 온 가족이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를 하던 때라 수지가 좋았다. 혼수철에는 두 시간만 자면서 하루에 저고리 4벌을 만드는 강행군도 했다. 덕분에 남편의 빚을 갚고 3남매 대학까지 뒷바라지할 수 있었다.
그의 장인 정신이 알려지면서 전주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는 2018년 '고물자 골목 재생사업 골목 장인 아카이브 프로그램'의 첫 번째 대상자로 오 대표를 선정했다. 센터 도움으로 그해 11월 인근 갤러리에서 '기억의 서술전' 전시회를 열고 배냇저고리부터 신랑신부용 한복, 회갑연, 두루마기, 모시옷, 수의, 버선 등 직접 지은 한복 수십 점을 전시했다.
최경은(전주교대 교수) 전주패션협회장은 "오 선생님은 양장부터 한복까지 섭렵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몸에 잘 맞고 편안한 한복을 만든다"라며 "깨끼바느질로는 전북에서 가장 오래 한길을 걸어온 분"이라고 평가했다. 오 대표는 자신이 만들거나 소장한 한복 작품을 전주시 등 공공기관에 기증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척추협착증 수술을 받은 후로는 재봉틀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지만, 오 대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다"며 오후에는 꼭 출근해 작업을 한다.
아울러 우리 전통 옷인 깨끼저고리의 명맥이 이어지도록 후계자를 키우는 일에도 열심이다. 진득한 제자를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차에 베트남인 팜 티 마이(28)씨가 바느질 솜씨를 전수받고 있어 큰 시름을 덜었다.
2015년 한국에 유학 온 팜씨는 이듬해부터 일주일에 두 번 오 대표를 찾아와 사사하고 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목표로 지난해 8월 전북대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고 있는 팜씨는 "베트남은 전통과 현대 중 한쪽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은 한복에서 보듯이 전통성을 유지하면서 새 트렌드를 가미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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