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남성우월주의'에 어퍼컷 날린 워킹맘 복싱 코치

입력
2021.06.16 04:30
수정
2021.06.16 07:58
23면

가부장제 여전한 농촌에서 20명 대상 강습
제자 "여성에게도 배울 수 있다고 깨달아야"

여성 복싱 코치 사바 사크르(가운데)가 11일 이집트 소도시 베니 수에프의 한 체육관에서 남성 수강생들에게 복싱 기술을 지도하고 있다. 베니 수에프=로이터 연합뉴스

여성 복싱 코치 사바 사크르(가운데)가 11일 이집트 소도시 베니 수에프의 한 체육관에서 남성 수강생들에게 복싱 기술을 지도하고 있다. 베니 수에프=로이터 연합뉴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가르치는 건 남성의 몫’이라 믿는 중동 국가 중에서도 여성 인권 상황이 가장 열악한 나라로 꼽히는 이집트에서, 가부장 노릇이 익숙한 농촌 남자들을 상대로 그것도 치고받는 권투를 가르치는 30대 열혈여성 지도자가 있다.

1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소도시 베니 수에프에서 복싱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36세 여성 사바 사크르를 소개했다. 심한 경우 조혼(早婚) 풍습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농촌 마을에서, 이 ‘워킹맘’은 18~30세 젊은 남성 20명에게 복싱을 가르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한 복싱 코치의 제안으로 복싱에 입문했다는 사크르가 처음부터 운동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특히 얼굴에 주먹이 날아온다는 게 커다란 공포였다고 한다. 그러나 훈련이 그를 바꿨다. 여러 차례 챔피언에 오르고 10개 넘는 메달을 따자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중동의 성(性)역할 고정관념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 강하다. 지도자 활동 초기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고 사크르는 털어놨다. 비결은 따로 없다. 열정이 보태지자 비로소 탁월한 실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여자한테 복싱을 강습받는다는 사실이 불편했다는 한 수강생은 로이터에 “여성에게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일 이집트 소도시 베니 수에프의 한 체육관에서 강습 중인 여성 복싱 코치 사바 사크르(왼쪽). 베니 수에프=로이터 연합뉴스

11일 이집트 소도시 베니 수에프의 한 체육관에서 강습 중인 여성 복싱 코치 사바 사크르(왼쪽). 베니 수에프=로이터 연합뉴스

이집트 여성의 인권 현실은 악명이 높다. 중동ㆍ아프리카에서도 최악의 후진국으로 꼽혀 왔다. 2013년 11월 영국의 톰슨 로이터 재단이 아랍연맹과 시리아 등 22개국 성평등 전문가 336명을 상대로 여성 대상 폭력, 가족 내 여성 처우, 여성 사회 참여 등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결과 이집트가 가장 나쁜 점수를 얻기도 했다. 당시 이집트 여성의 99.3%가 성추행 경험이 있고 전체 여성 인구의 91%인 2,720만 명이 할례(FGMㆍ여성 성기 절단)를 받았으며 성인 여성의 63%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조사 결과가 함께 공개됐다.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런 형편에 괄목할 만한 개선이 이뤄진 것도 아니다. 올 3월 이집트의 한 30대 여성 의사가 남성 직장 동료를 집에 초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웃들에게 폭행당한 뒤 심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투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제2, 제3의 사크르가 배출될 여건은 차츰 만들어지는 분위기다. 여성 할례 금지 강화 입법이 대표적이다. 위반 처벌 최고 형량이 올해 징역 7년에서 20년으로 늘었는데, 이날 FGM 금지 위원회는 2008년 법적 금지에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성적 학대 행위가 이번 개정으로 줄어들 수 있을 듯하다고 평가했다. “앞으로 국무원과 최고사법위원회에 여성 판사를 임명하겠다”는 3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약속도 성과라는 게 여성계 얘기다.


이에스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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