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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여의도에 불었던 '부동산 피바람' 시작은 창대했지만...

입력
2021.06.12 19:00
수정
2021.06.1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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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부동산 투기 뿌리 뽑기의 흑역사
YS의 '윗물맑기운동' 계기로 여야 자체조사
박준규 국회의장 등 4명 의원직 사퇴로 이어져
국회윤리위까지 가동했지만 조사·징계 흐지부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울고 웃는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아파트 단지의 모습. 연합뉴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울고 웃는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아파트 단지의 모습. 연합뉴스

"대한민국은 부동산 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를 비틀어본 표현인데 듣기 어떠신가요. 눈만 뜨면 천정부지로 솟는 집값, 들썩이는 땅값을 보면 그리 과한 말은 아니지 싶은데요. '땀'보다 '땅'으로 돈을 버는 게 쉬운 세상. 성난 부동산 민심에 놀란 정치권은 요즘 수습책을 내놓느라 바쁩니다.

성난 부동산 민심에 놀란 여야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부동산 전수조사를 맡기며 분주하게 수습책을 모색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권익위가 발표한 전수조사 결과를 토대로 징계 절차에 착수했고(왼쪽 사진), 국민의힘은 11일 권익위원회에 전수조사를 공식 의뢰했다. 연합뉴스

성난 부동산 민심에 놀란 여야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부동산 전수조사를 맡기며 분주하게 수습책을 모색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권익위가 발표한 전수조사 결과를 토대로 징계 절차에 착수했고(왼쪽 사진), 국민의힘은 11일 권익위원회에 전수조사를 공식 의뢰했다. 연합뉴스

부동산 정책 실패, LH 투기 의혹 사건으로 '원죄'를 쌓은 더불어민주당이 먼저 부동산 전수조사란 칼을 빼 들었죠. 국민권익위원회 조사에 따라 부동산 투기 및 불법 거래가 의심되는 소속 의원 12명 전원에 대해 '자진 탈당'을 결의하고 나섰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린 초강수 결정의 충격파는 국민의힘으로까지 넘어왔습니다. 도저히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거죠. 누군가는 억울해서 '부글부글', 또 누군가는 불안해서 '전전긍긍'하는 의원님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네요.


YS '윗물맑기운동'... 여의도 '부동산 피바람' 서막


문민정부 시대의 서막을 연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부정부패 척결 ▲경제회복 ▲국가기강 확립을 3대 당면과제로 내세운 '신한국창조'를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민정부 시대의 서막을 연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부정부패 척결 ▲경제회복 ▲국가기강 확립을 3대 당면과제로 내세운 '신한국창조'를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런데 여의도를 강타한 '부동산 피바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8년 전 불었던 피바람의 강도는 더 셌고, 후폭풍도 상당했죠. 그때의 피바람은 태풍으로 커졌을까요, 미풍으로 끝났을까요. 너무나 뻔히 예상되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한번 따라와 보시죠. 그때나 지금이나 닮은 구석이 많아 깜짝 놀라실 겁니다.

1993년, 여의도에 '부동산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취임 일성으로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포함한 직계가족 재산 내역을 첫 국무회의(1993년 2월 27일)에서 손수 공개하며 여의도 압박에 들어갑니다.

그 이름마저 거룩한 '윗물맑기운동'의 시작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는 제도화돼 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동산 투기 등 재산 부정 축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지만 국회의원은 상대적으로 '언터처블'이었습니다. 대신 기업이 주요 타깃이 됐죠.


대기업 호령하던 저승사자, '젊은' 김종인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례로 1990년 3당 통합 직후 경기 침체에 치안 불안까지 겹쳐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을 겪었던 노태우 정권은 청와대 직속의 ▲부동산대책 특별점검반 ▲특명사정반을 무기한 운영하며 민심 수습에 나섰는데요. 기업들이 먼저 매를 맞았습니다.

특히 당시 부동산대책 특별점검반 반장은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 '신스틸러' 맞네요.

베일 벗은 배지들의 '억' 소리나는 재산

'윗물맑기운동'의 하나로 추진된 공직자 및 정치인 재산공개 소식을 전한 1993년 3월 19일자 한국일보 지면.

'윗물맑기운동'의 하나로 추진된 공직자 및 정치인 재산공개 소식을 전한 1993년 3월 19일자 한국일보 지면.

자, 다시 여의도로 돌아와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나선 YS에 떠밀린 집권여당 민자당은 국무위원 재산공개 이틀 뒤인 1993년 3월 22일 소속 의원 161명의 재산 공개를 단행합니다.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민자당의 강재섭 대변인이 1993년 3월 22일 여의도 당사에서 소속의원 및 당무위원 1백61명의 재산공개내역을 일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자당의 강재섭 대변인이 1993년 3월 22일 여의도 당사에서 소속의원 및 당무위원 1백61명의 재산공개내역을 일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칼은 칼집에 넣어두고도 빼든 것이나 마찬가지 효과를 거둔 셈"이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마따나, '공개'만으로도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1989년, 1990년 12회에 걸쳐 세무 당국이 공개한 부동산 투기자 명단에 정치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민심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죠. '억' 소리 여러 번 나는 의원님들의 재산 규모에 놀란 건 두 번째고요.


'부동산 투기 의혹' 국회의장도 날아갔다

재산공개 이후 초비상에 걸린 민자당의 소식을 전한 1993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 지면.

재산공개 이후 초비상에 걸린 민자당의 소식을 전한 1993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 지면.

이제부터 본격 피바람이 시작됩니다. 제일 먼저 입법부 수장이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부동산 과다 보유와 투기 의혹에 휩싸인 지 이틀 만에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납니다. (4개월 뒤인 7월엔 의원직마저 사퇴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하죠.)

박 전 국회의장은 아들 명의로 땅 17만 평과 75가구가 사는 연립주택 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었네요.

재산 공개 파동으로 국회의장직을 사퇴한 박준규 전 의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한달 여 만인 1993년 4월 21일 의장 공관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산 공개 파동으로 국회의장직을 사퇴한 박준규 전 의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한달 여 만인 1993년 4월 21일 의장 공관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밖에도 재산공개 파문으로 옷을 벗은 민자당 의원은 3명 더 있습니다. 58억400만 원을 신고한 국회국방위원장 유학성 의원, 46억1,800만 원을 신고한 전직 국회의장 김재순 의원도 자진사퇴했고요. 그린벨트 훼손 혐의까지 더해진 김문기 의원은 의원직 사퇴는 물론 사법처리까지 받은 기록이 나옵니다.

세 사람 모두 재산 공개 8일 만에 의원직에서 물러났네요.

옷 벗은 의원만 4명, 제명 등 줄줄이 징계

민자당은 재산공개 이후 6개월간의 당내 조사 끝에 재산 축소 및 부동산 투기 물의를 일으킨 의원 8명에 대해 징계 결과를 발표했다. 관련 소식을 전한 1993년 9월 17일자 한국일보 지면.

민자당은 재산공개 이후 6개월간의 당내 조사 끝에 재산 축소 및 부동산 투기 물의를 일으킨 의원 8명에 대해 징계 결과를 발표했다. 관련 소식을 전한 1993년 9월 17일자 한국일보 지면.

이뿐일까요. 당내 '재산공개진상파악 특위'를 꾸린 민자당은 나머지 문제 의원들을 6개월 동안 조사한 끝에 총 8명에 대해 ▲제명 ▲6개월 당원권 정지 ▲비공개 경고 등 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재산공개 파문을 일단락 짓습니다.


"인민재판이냐" 반발... 구명운동 등 데자뷔

28년 전에도, 지금도 반발하는 의원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억울하다"고 적극 구명 운동을 펼치거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것도 판박이다. 왼쪽은 최근 권익위 조사에서 업무상 비밀 이용 의혹이 제기된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박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오른쪽 사진은 재산공개 파문 당시 의혹이 불거진 민자당 의원들의 각종 대응 방식을 전한 1993년 3월 26일자 한국일보 지면. 연합뉴스·한국일보 자료사진

28년 전에도, 지금도 반발하는 의원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억울하다"고 적극 구명 운동을 펼치거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것도 판박이다. 왼쪽은 최근 권익위 조사에서 업무상 비밀 이용 의혹이 제기된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박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오른쪽 사진은 재산공개 파문 당시 의혹이 불거진 민자당 의원들의 각종 대응 방식을 전한 1993년 3월 26일자 한국일보 지면. 연합뉴스·한국일보 자료사진


물론 진통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난리도 아니었죠. 지금 문제가 된 12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반발하고 억울해하는 상황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졌습니다.

당시에도 부동산 투기 관련 조사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20여 명의 민자당 의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 "인민재판식 인식공격"이라고 억울해하면서도 대책 마련에 고심했는데요. 유형별로 따져보죠.

먼저 적극적인 '읍소형'입니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언론사에 해명성 보도자료를 배포하거나, 청와대 실력자들을 찾아가 구명운동을 펼치는 스타일입니다.

낯익은 이름도 등장하네요.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내 문제는 모두 해명됐다"며 조사대상이 아님을 언론사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민정·공화계 거세작전이냐" 정치적 의도 시각도


재산공개 파문 속 1993년 3월 26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민자당 당무회의는 살얼음판 분위기였다. 김종필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를 비롯한 의원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산공개 파문 속 1993년 3월 26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민자당 당무회의는 살얼음판 분위기였다. 김종필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를 비롯한 의원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음은 납작 엎드리는 인내(?)형입니다. "정부 차관급 인사와 민주당 의원들의 재산공개가 되면 여론의 관심에서 벗어나겠지"라며 어서 빨리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경우입니다.

'남 탓'과 '음모론'으로 물타기에 나서기도 합니다. 일단 청와대와 당 지도부를 향한 불만을 쏟아내기 바쁘죠. "재산이 많다는 사실만 갖고 법 절차를 무시해 사람을 때려잡느냐", "이게 문민시대의 개혁 정치냐" 등 목소리를 높입니다.

민자당 의원들의 반발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최근 러시아의 불행은 개혁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구세력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며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민자당 의원 재산공개 이틀째인 1993년 3월 24일 주돈식 청와대 정무수석은 여의도 민자당사로 김종필 대표를 방문, 재산공개 후속조치와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전달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정치정화'를 내세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지를 전한 1993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자당 의원들의 반발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최근 러시아의 불행은 개혁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구세력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며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민자당 의원 재산공개 이틀째인 1993년 3월 24일 주돈식 청와대 정무수석은 여의도 민자당사로 김종필 대표를 방문, 재산공개 후속조치와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전달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정치정화'를 내세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지를 전한 1993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재산 규모가 큰 정치인이 민주계보다는 여권 출신인 민정, 공화계쪽에 많다 보니 재산공개가 구 여권 인사들을 '거세'하기 위한 노림수였다는 거죠.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자당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하며, 그 눈물은 회개와 참회의 눈물이어야 한다"며 더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야당, 한발 늦었지만 "진정한 공개" 약속하며 차별화

1993년 4월 6일 이부영 민주당 재산공개대책위 위원장은 민주당 의원들의 재산공개 등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민주당의 재산공개 내용을 평가한 1993년 4월 7일자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4월 6일 이부영 민주당 재산공개대책위 위원장은 민주당 의원들의 재산공개 등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민주당의 재산공개 내용을 평가한 1993년 4월 7일자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자당이 그야말로 탈탈 털리는 동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야당인 민주당이었습니다. 지금 국민의힘이 전전긍긍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는데요. 여당의 재산공개가 부실해 "진실성이 없다"고 대여 공세에 집중했던 민주당도 재산공개 전수조사를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민주당 당직자들이 소속 의원들로부터 재산과 관련한 서류를 접수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주당 당직자들이 소속 의원들로부터 재산과 관련한 서류를 접수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늦은 만큼 더 확실해야겠죠. 민자당 조치 이후 보름이 지난 1993년 4월 6일 소속 의원 95명의 재산을 공개한 민주당 재산공개대책위(이부영 위원장)는 "진정한 공개"를 약속합니다.

가명재산, 해외재산은 물론 골동품, 예술품 등을 다 포함시키고 부동산도 '시가'를 기준으로 삼으며 민자당과 차별화를 꾀했죠. 당내 반발을 의식한 듯 의혹이 불거진 의원들의 땅을 직접 '실사'에 나서거나, 소명 자료를 추가로 받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핏대 세우더니 결국 야당도 '제 식구 감싸기'

엄정한 후속조치를 약속했던 민주당은 재산공개 이후 제 식구 감싸기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됐다. 그 소식을 전한 1993년 4월 9일자 한국일보 지면.

엄정한 후속조치를 약속했던 민주당은 재산공개 이후 제 식구 감싸기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됐다. 그 소식을 전한 1993년 4월 9일자 한국일보 지면.

막상 까놓고 보니 야당이라고 다를 건 없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재산 평균은 15억 원대로, 민자당 의원들의 재산 평균인 25억 원에는 못 미쳤지만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진 의원들만 10여 명에 달했네요.

이기택 민주당 대표가 1993년 4월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당 재산공개 파문을 마무리 짓고 있다. '엄정 조치'를 강조했던 이 대표는 재산 공개 이후 "우리는 민자당에 비해 부도덕하게 재산을 증식한 의원이 거의 없다"며 후속조치에 미적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기택 민주당 대표가 1993년 4월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당 재산공개 파문을 마무리 짓고 있다. '엄정 조치'를 강조했던 이 대표는 재산 공개 이후 "우리는 민자당에 비해 부도덕하게 재산을 증식한 의원이 거의 없다"며 후속조치에 미적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런데 공개 이후 민자당을 향해 핏대를 세우던 민주당이 돌연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엄중 조치하겠다"던 이기택 대표는 "성인군자의 도덕기준을 통해 여론재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발 물러섭니다. 정치적 망신주기보다는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서 법적 근거를 마련한 뒤에 제재에 나서자는 건데, 당 내부에서조차 '이중잣대'란 비난을 자초했죠. 결국 징계는 유야무야 됩니다.

지금도 그때도 솜방망이였던 국회 윤리위

여야 의원들의 재산공개 이후 국회는 6개월 뒤 공직자 윤리위를 가동했지만, 처음에 다짐했던 진상규명 의지는 갈수록 퇴색돼 갔다. 1993년 10월 30일자 한국일보 기사의 제목 "철저 조사 공언 공염불 조짐... 움츠리는 국회윤리위"다.

여야 의원들의 재산공개 이후 국회는 6개월 뒤 공직자 윤리위를 가동했지만, 처음에 다짐했던 진상규명 의지는 갈수록 퇴색돼 갔다. 1993년 10월 30일자 한국일보 기사의 제목 "철저 조사 공언 공염불 조짐... 움츠리는 국회윤리위"다.

같은 해 9월 7일 국회는 국회 공직자윤리위를 가동합니다. 의혹 규명을 위한 실사 작업에 착수하기 위한 기구로 입법부뿐 아니라 사법부, 행정부에도 각 기관별 윤리위가 설치됐죠.

자, 국회 공직자윤리위는 제 역할을 다 했을까요. "철저한 조사를 공언했던 것과 달리 실사 수단의 한계, 정치권의 은근한 견제 분위기 등을 이유로 대며 눈에 띄게 기력이 빠진 모습"이란 대목이 눈에 띄네요.

국회 공직자윤리위 활동은 갈수록 유야무야 됐다. 소명 대상 축소 발표, 의원 명단 비공개 방침 등이 문제가 돼 윤리위원들이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한 1993년 10월 30일자, 31일자 한국일보 지면.

국회 공직자윤리위 활동은 갈수록 유야무야 됐다. 소명 대상 축소 발표, 의원 명단 비공개 방침 등이 문제가 돼 윤리위원들이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한 1993년 10월 30일자, 31일자 한국일보 지면.

당장 부동산 조사 관련 소명자료를 제출한 의원은 40여 명에 달하는데, 10명 내외라고 축소 발표한 것부터 진상규명 의지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재산 실사 결과를 비공개 처리한다는 방침에 반발한 윤리위원들의 사퇴도 잇따랐죠. "윤리위에 운영 윤리가 없다"며 사퇴한 1호 위원은 '원조대쪽', '미스터 쓴소리'였던 조순형 의원(당시 국민회의 소속)이었네요.

3개월에 걸친 실사 작업이 끝난 12월 기사를 볼까요. "윤리위가 오히려 면죄부를 줬다. '유선무죄(有線無罪), 무선유죄(無線有罪)'라는 유행어를 다시 상기시킬 만큼 파문을 최소화시키려는 흔적이 엿보인다”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고위공직자와 정치인 등 사회 기득권층의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기 위한 시도는 역대 정부마다 이어져 왔다. 늘 미완에 그쳐 문제였지만.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위공직자와 정치인 등 사회 기득권층의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기 위한 시도는 역대 정부마다 이어져 왔다. 늘 미완에 그쳐 문제였지만. 한국일보 자료사진

결국 1993년 여의도를 강타했던 부동산 피바람은 미풍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2021 국회의원 부동산 전수조사는 과연 태풍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했던 28년 전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입니다.



강윤주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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